담징(579년-631년)은 고구려의 중으로서 재능있는 화가이고 기술자이며 또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담징은 610년에 일본에 초빙되여가 그 나라의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아스까문화가 한창 발전하고있던 때이므로 유능한 학자, 기술자들이 많이 요구되였다.
담징은 이러한 시기에 일본정부의 초빙을 받고 그곳에 가게 되였다.
그는 일본에서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맡아 그리였다.
금당벽화는 안팎모두 12폭의 불교관계의 크고작은 그림들과 천정밑의 20여개의 작은 벽면에 2개씩 그려놓은 비천(하늘을 나는 선녀)그림들로 이루어져있다.
수많은 그림가운데서도 6폭의 《아미타여래상》은 구도가 대칭적이면서 성격이 특색있게 살아난것으로 하여 더욱 이채로왔다.
특히 장방안 련꽃방석우에 위엄있게 틀고앉은 주인공의 모습은 예술적형상이 훌륭하여 당시 승려들과 화공들의 경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법륭사의 벽화는 동방미술사는 말할것도 없고 세계미술사에서도 특이한 자리를 차지하며 더우기는 일본의 회화미술의 첫장을 이루는 명화로 꼽히였다.
이 벽화는 창작된 때로부터 천수백년이 지났으나 색 하나, 선 하나 변함없이 그대로 보존되여 세계적인 보물로 미술가들의 찬탄의 대상으로 되여왔었다.
그러던중 1949년 1월 법륭사가 불타면서 금당의 벽화를 잃게 되였다.
그후 1968년 일류급화가들이 최상의 자재로 다시 복귀하여놓았지만 원화를 살리지 못하였다고 그들자신이 말하였다.
담징은 일본에 건너가서 회화뿐 아니라 과학기술발전에서도 큰 역할을 놀았다. 그는 발전된 고구려의 기술문화에 기초하여 채색법과 종이, 먹 그리고 물방아를 만들어쓰는 기술을 가르쳐주었다. 이러한 담징의 활동은 일본의 고대정사인 《일본서기》와 《법륭사전》에 기록되여있다.
그의 뛰여난 학문과 기술, 회화와 공예술은 일본의 문화와 기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은 7세기초 고구려의 과학문화발전수준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담 징 [내나라] 25/09/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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