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23회) 1권 3장-10 / 철창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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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35회 작성일 20-10-09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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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내가 손가락비트는 고문을 당하고있던 어느날 화성의숙숙장을 하던 최동오선생이 심문실 한쪽에 세워놓은 간막이뒤에서 나를 피뜩 내다보다가 사라졌다.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여서 처음에는 혹시 무슨 착각이라도 하지 않았는가 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  중략...

 

"내가 갇혀있던 감방은 북쪽복도의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칸이였다. 북향이여서 일년 내내 해볕이 들지 않아 곰팡이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겨울이면 벽에 성에가 하얗게 돋아 녹을줄 몰랐다. 우리가 감옥으로 이송되였을 때는 가을이였는데 감방안이 겨울처럼 찼다."...   중략... 

 

"옥중에서 투쟁을 벌리자니 외부와 련계를 취하는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해결하자면 간수들을 교양하여 우리의 동정자로 만들어야 했다.​" ...  중략...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싸워야 하며 반일력량을 어떻게 하나로 결속하여야 하겠는가, 혁명의 령도기관으로서의 당은 어떻게 창건하여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가면 무슨 사업부터 착수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하였다."

http://5.189.187.134/contents/heiguo/movie/ko/3-10-K.mp4

 

10. 철창속에서

 

《길림바람》이 만주의 여러 지역을 흽쓸게 되자 일제와 중국의 반동군벌은 점차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게 되였다. 길림에서 세차게 일어난 청년학생운동과 중동철도사건, 남만청총대회사건으로 하여 우리에 대한 소문이 여러곳에 퍼지게 되면서부터 적들은 길림의 공기를 소란스럽게 하는 장본인이 청년학생들이라는것을 간파하고 우리의 뒤를 캐기 시작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하여 도처에 정탐군들을 박아넣고 조선사람들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감시하는 한편 중국의 반동군벌을 부추겨 공산주의자들과 반일독립운동자들을 닥치는대로 검거투옥하였다. 길림의 형세는 매우 삼엄해졌으며 우리의 앞길에는 어려운 고비가 닥쳐오게 되였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길림시내에 들어와 박혀있던 종파분자들은 룡정, 반석, 돈화와 같은곳으로 달아나고 독립운동자들은 국적을 중국국적으로 바꾸어가지고 관내로 들어가거나 왕청문과 같은곳으로 피신해버리였다. 1929년 가을의 길림은 벌써 반일운동자들이 와글거리던 조선의 해외정치운동의 중심지가 아니였다.

이런 때 길림제5중학교 학생들이 독서회에서 쓸데없이 떠들어댄것이 실머리가 되여 우리 동무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방금 왕청문에서 돌아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뛰여다니던 나도 반동군벌당국에 걸려들었다. 5중학교의 학생들이 육문중학교의 공청조직도 다 불었던것이다.

경찰들은 학생운동의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였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무지막지한 고문을 들이댔다. 그때까지 우리가 벌려온 투쟁내용과 길림시내에 거미줄처럼 늘여져있던 조직망을 들춰내고 그 배후세력을 알아내자는것이였다.

우리는 좌익서적을 읽었다는것 이외에 다른 말은 입밖에 내지 않기로 하였다. 학생이 책을 읽은것이 무슨 잘못이냐, 우리는 책방에서 파는 책을 읽었다, 죄를 따지려면 책을 출판하고 팔도록 허가한 당국에 먼저 물어야 할것이 아니냐, 심문을 들이대는 형리들에게 이런 항변을 하면서 끝까지 뻗대였다.

내가 손가락비트는 고문을 당하고있던 어느날 화성의숙숙장을 하던 최동오선생이 심문실 한쪽에 세워놓은 간막이뒤에서 나를 피뜩 내다보다가 사라졌다. 너무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여서 처음에는 혹시 무슨 착각이라도 하지 않았는가 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화성의숙시절의 숙장 최동오선생이 틀림없었다. 적들이 화성의숙시절의 스승까지 심문실에 데려온것을 보면 나의 뒤를 어지간히 깊이 캔 모양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최동오선생의 출현은 나의 생각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때 최동오선생은 중국말도 잘하고 외교사업에도 능하여 국민부의 외교위원장의 직책을 맡고있었다. 선생은 국민당반동군벌당국과의 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주로 길림에 있으면서 청년학생들과도 일정하게 련계를 가지였다.

만일 그가 우리의 정체에 대하여 사실대로 반동군벌당국에 로출시키는 날에는 사건을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려던 우리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수 있었다. 더구나 중동철도사건때 우리가 쏘련을 옹호하여 투쟁한 전적이 조금이라도 드러나게 된다면 도저히 무사할수 없었다.

영국, 미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사촉과 조종하에 중국국민당 정부와 봉계군벌은 1920년대말에 이르러 배신적인 반쏘책동에 집요하게 매달리였다. 장개석정부는 광주인민봉기가 실패로 돌아간후 광주주재 쏘련령사를 총살하고 쏘련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반쏘는 제국주의렬강들에게 아첨하여 그 보호와 지지를 받아보려는 장개석의 주패장이였다.

군벌들의 입에서는 《적색제국주의를 반대한다.》는 구호가 자주 울려나왔다. 그들은 중국인민의 민족감정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진상을 은페하였으며 반쏘사상을 집요하게 고취하였다.

군벌들의 선전에 기만당한 대학생들과 청년인테리들까지도 《우랄산을 점령하고 바이깔호를 차지하자!》, 《바이깔호에서 말물을 먹이자!》는 호전적이고 도발적인 폭언을 마구 해대면서 쏘련땅을 넘겨다보았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군벌은 반쏘도발의 첫 순서로 중동철도를 공격하였다. 중쏘량국은 협정에 따라 재산과 설비를 절반씩 차지하고 리사회라는 관리기구를 통하여 이 철도를 공동으로 경영하고있었다. 군벌은 무력을 동원하여 무선전신국과 관리국을 점령하고 철도를 완전히 탈취하였으며 쏘련측의 주권을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리였다. 중동철도를 장악한 다음에는 곧 국경을 넘어 세개 방향으로 쏘련을 침공하였다. 이렇게 되여 쏘련군대와 중국반동군벌군대사이에는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그때 풍용대학과 동북대학의 일부 우익계 학생들은 반동들의 사촉을 받아 무장까지 하고 쏘련을 반대하여나섰다.

우리는 국민당정부와 반동군벌의 반쏘책동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공청원들과 반제청년동맹원들을 투쟁에 궐기시키고 사회주의나라인 쏘련을 옹호하여나섰다.

각성되지 못한 중국의 일부 청년들은 우리를 중화민족의 리익을 《침해》하는자들을 돕는 나쁜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멀리 하였다. 참으로 딱한 일이였다.

우리는 시내 여러곳에 군벌의 반쏘책동의 본질을 발가놓는 삐라도 뿌리고 중국사람들속에 들어가 선전사업도 벌려 군벌군대가 중동철도를 탈취하고 쏘련을 침공한것은 10월혁명후 중국과 체결한 일체 불평등조약을 페기하고 중국에 물심량면의 원조를 준 쏘련에 대한 용납할수 없는 배신행위이며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한 밑천을 얻으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것을 폭로하였다.

국민당반동들과 군벌들의 선전에 속아서 쏘련을 적대시하던 사람들도 우리의 선전을 듣고나서는 반쏘침공의 위험성과 본질을 비로소 깨닫고 그것을 반대하는데로 태도와 립장을 바꾸었다.

우리는 중국의 진보적인 청년들과 함께 무장을 들고 쏘련을 공격하겠다고 날치는 풍용대학 학생들에게도 된타격을 주었다.

중동철도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진행한 투쟁은 쏘련을 정치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국제주의적투쟁이였다. 우리는 그때 지구상에 처음으로 수립된 사회주의제도를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싸우는것을 공산주의자들앞에 부과된 성스러운 국제주의적의무로 간주하였다.

중동철도사건을 둘러싸고 우리가 진행한 투쟁을 통하여 중국인민은 군벌의 진면모를 똑똑히 파악할수 있게 되였으며 군벌의 배후에서 그들을 반쏘행동에로 끊임없이 부추기는 제국주의자들의 본심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였다. 조중인민은 중동철도사건을 계기로 크게 각성되였다.

당시 국민당군벌은 쏘련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최동오선생이 왔다간 다음에도 심문자들은 나를 여전히 독서회사건의 주모자로만 취급하였다. 군벌당국은 최동오선생을 데려다가 나의 신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내가 쏘련과 련계가 있는지, 어떤 운동을 했는지 알아본것 같았다. 그러나 최동오선생이 나한테 해될 말은 하지 않은것 같았다.

우리는 얼마후 길림감옥으로 넘어갔다. 길림감옥은 간수가 가운데 앉아있으면서 사방을 감시할수 있게 동서남북으로 복도를 내고 그 복도의 량옆에 감방들이 붙어있는 십자형건물이였다.

내가 갇혀있던 감방은 북쪽복도의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 칸이였다. 북향이여서 일년 내내 해볕이 들지 않아 곰팡이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겨울이면 벽에 성에가 하얗게 돋아 녹을줄 몰랐다. 우리가 감옥으로 이송되였을 때는 가을이였는데 감방안이 겨울처럼 찼다.

군벌당국은 죄수들을 다루는데서 심한 민족적차별을 두었다. 간수들은 《조선놈》이니, 《조선망국노》니 하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무거운 쇠덩어리가 매달린 족쇄를 조선학생들의 발목에 채웠다.

군벌당국은 식사조건과 감옥안의 보잘것없는 의료시설을 리용하는데서도 중국인정치범들과 차별을 두었다.

나는 옥중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혁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감옥은 하나의 투쟁무대라고 할수 있다. 감옥을 단순히 죄인들을 가두어두는곳이라고 생각하면 피동에 빠져 아무것도 할수 없다. 그러나 감옥을 세계의 한 부분이라고 여기게 되면 그 비좁은 공간속에서도 혁명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할수 있는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투쟁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외부와의 련계를 취하여 파괴된 조직들을 한시바삐 수습하고 움직이게 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또한 군벌당국과 싸워 출옥날자를 앞당기리라고 결심하였다.

옥중에서 투쟁을 벌리자니 외부와 련계를 취하는것이 문제였다. 그것을 해결하자면 간수들을 교양하여 우리의 동정자로 만들어야 했다.

간수를 쟁취하려는 나의 의도는 예상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그때 감옥당국에서는 감방들을 수리하면서 얼마동안 우리들을 잡범들과 같이 있게 하였다. 감옥당국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우리한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어느날 나와 한감방에서 생활하던 중국인죄수가 갑자기 독감에 걸려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는 부자집을 털다가 잡혀들어온 사람이였는데 행동거지가 매우 조폭하였다.

내가 잡범들의 방에 옮겨간 날 《깡툴》이라고 불리우는 그 죄수는 상좌에 올방자를 틀고앉아서 우리더러 돈도 좋고 먹을것도 좋으니 한턱 내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하였다. 자기네 감방에 처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법도를 지키게 되여있으니 너희들도 그 법도를 지켜야 하지 않는가고 하면서 호통질을 하였다. 아주 감때사납고 무지막지한 사람이였다.

나는 그 죄수에게 며칠동안 취조실에서 단련을 받다가 들어오는 사람들이 돈은 어디에서 나며 먹을것은 어데서 생기겠는가, 턱으로 말하면 감방생활을 오래 한 당신들이 내는것이 도리가 아닌가고 오금을 박았다.

말문이 막힌 《깡툴》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나를 쏘아보기만 하였다.

평소에 이처럼 폭군과 같이 전횡을 부리던 죄수이기때문에 그가 고열에 시달리며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였지만 감방사람들은 모두 강건너 불보듯하면서 그를 따뜻하게 간호해주지 않았다.

나는 감옥에 들어올 때 손정도목사네 집에서 보내준 이불을 그에게 덮어주고 간수를 불러 감옥병원에서 약을 가져다달라고 요구하였다.

행동이 거칠고 붙임성이 없는 그 죄수를 평시부터 아니꼽게 보아오던 리가성을 가진 이 간수는 조선사람이 중국사람을 살붙이처럼 돌봐주는것을 보고 의아해하였다. 우리의 성의있는 간호로 앓던 죄수는 인차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후부터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는 변화가 생기였다. 간수들도 마음대로 다루지 못해 쩔쩔매는 괴벽하고 포악한 잡범이 중학생인 내앞에서 갑자기 고분고분한 사람으로 변하자 리간수는 자못 신기하게 생각하며 나를 어렵게 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길림감옥의 간수들가운데서 비교적 온순하고 민족성이 있는 사람이였다. 밖에 있는 조직성원들은 리간수의 출신이 비천하다는것과 그가 밥을 벌어먹기 위해서 간수가 된 사람이라고 통보해주었다. 나는 이모저모로 리간수를 료해하던 끝에 그를 쟁취하기로 결심하고 그와 말할 기회를 많이 만들었다. 그 과정에 그가 동생의 약혼식을 앞두고 례장감을 장만하지 못해 안타까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나는 우리 동무들이 감옥으로 면회를 온 기회에 리간수가 안타까와하는 문제를 상정시키고 조직을 발동해서 그의 애로를 풀어주도록 대책을 세워주었다.

며칠후 리간수가 나를 찾아와 례장감을 장만해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감옥당국이 당신을 공산주의자라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인가고 물었다.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대답하자 그는 모를 일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비적》이라고 하는데 아무려면 당신같이 선량한 사람들이 남의것을 빼앗겠는가, 당신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이 틀림없다면 공산주의자들에게 《비적》의 딱지를 붙이는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열을 내여 말했다.

그래서 나는 공산주의자들은 착취와 압박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잘 사는 사회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싸우는 사람들이다, 돈많고 권세있는놈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비적》이라고 하면서 욕하는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지주, 자본가나 토호, 매국노들이 판을 치는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엎으려고 하기때문이라고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리간수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우리가 무식하다나니 지금까지 당국의 거짓선전에 넘어갔는데 이제부터는 그런 말을 곧이 듣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후부터 리간수는 근무교대를 하고 돌아갈 때마다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다른 감방에 무슨 련락을 해달라고 부탁하면 선선히 들어주었다. 얼마후부터는 그를 통하여 외부와의 련계까지 취할수 있었다. 이때부터 나의 감옥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와졌다.

그러나 모든 간수들이 다 리간수와 같이 선의를 가지고 우리를 대해준것은 아니였다. 간수들중에는 문구멍으로 감방안을 엿보면서 수인들을 못살게 구는 뱀같은 간수장이 한명 있었다.

길림감옥에 있는 간수장이 모두 세명이였는데 그 간수장에 대한 평이 제일 나빴다. 그가 당번을 서는 시간에는 수인들이 감방에서 하품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어느날 그 간수장의 버릇을 떼여주기로 결심한 우리는 이 일을 누구에게 시킬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옥중에서 그 적임자를 선정하기 위한 토의를 하였다. 그때 길림제5중학교 3학년에 다니다가 붙잡혀들어온 황수전이라는 중국학생이 이 일을 자기가 맡아서 해보겠다고 자청해나섰다. 독서회사건으로 감옥에 끌려온 학생들중 조선학생은 모두 2명뿐이였고 나머지는 중국학생들이였다.

우리는 그에게 간수장을 혼내워주면 독감방에 갇히워 적어도 다섯달은 더 고생하겠는데 그래도 일없겠는가고 물었다. 황수전은 동무들을 위해 희생할셈치고 어떻게 하든지 그놈을 혼내주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이제 묘한 방법으로 간수장의 버릇을 뚝 떼주겠는데 너희들은 옆에서 구경이나 하라고 하였다. 그는 참대저가락끝을 뾰족하게 깎아두었다가 간수장이 감시구로 감방안을 들여다볼 때 눈을 찔렀다. 간수장의 눈에서는 피와 함께 먹물이 흘러나왔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감방안에 갇힌 학생들은 그때 황수전을 보고 모두 영웅이라고 추어주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황수전자신은 추운 겨울날 불도 때지 않은 독감방에 갇히워 한동안 죽을 고생을 하였다.

학생들은 간수들에게 황수전을 독감방에서 내놓지 않으면 네놈들의 눈을 다 찔러놓겠다고 을러메면서 그를 빨리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감옥당국은 학생들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후부터 우리는 감방에서 하고싶은것을 다하였다. 모임을 하고싶으면 모임을 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감방들에도 마음대로 다니였다. 내가 어느 감방에 가겠다고 하면 간수들은 어서 가보라고 하면서 문까지 열어주었다.

나는 감옥생활을 할 때 손정도목사한테서 많은 방조를 받았다.

손정도목사는 내가 길림에서 혁명활동을 한 전기간 나를 친혈육에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사람이였다. 그는 국내에 있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와 두터운 친분관계를 맺고있었다. 같은 학교(숭실중학교) 출신이라는 관념도 작용하였지만 그보다는 사상과 리념의 공통성이 아버지와 손정도를 뜨거운 우정으로 결합시키였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생전에 손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손정도는 3.1운동직후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림시정부에서 한동안 의정원 의장직을 맡아보았다. 한때는 상해에서 김구, 조상섭, 리유필, 윤기섭 등과 함께 무력항쟁을 담당할 군사인재양성의 사명을 띤 로병회를 조직하고 그 단체의 로공부장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로병회가 해체되고 림시정부내부에서 파벌투쟁이 심해지자 그에 환멸을 느끼고 길림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길림에 와서는 례배당을 하나 꾸려놓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가 대중교양장소로 널리 리용하고있던 례배당이 바로 그 례배당이였다. 원래 손목사는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다. 그는 길림의 기독교신자들과 독립운동자들속에서 무시할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신자들속에는 손정도처럼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훌륭한 애국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기도를 드려도 조선을 위한 기도를 드리였고 《하느님》에게 하소연을 하여도 망국의 불행을 덜어달라는 하소연을 하였다. 그들의 순결한 신앙심은 항상 애국심과 련결되여있었으며 평화롭고 화목하고 자유로운 락원을 건설하려는 그들의 념원은 시종일관 나라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쟁에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았다.

천도교와 불교계 신자들의 절대다수도 애국자들이였다.

손정도가 류길학우회 고문이였으므로 나는 그와 자주 상종하였다. 그는 나를 만날 때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신것이 분하고 애석하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을 이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을 위해 투신하라고 격려하군하였다.

내가 길림에 와서 육문중학교에서 3년동안이나 공부할수 있은것은 손정도와 같은 아버지의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때문이였다.

손정도목사는 어머니의 삯빨래와 삯바느질로 겨우 유지되여가는 우리 집의 구차한 살림살이를 걱정하면서 나에게 학비를 여러번 보태주었다. 목사의 부인도 나를 몹시 사랑해주었다. 명절때면 그 부인이 나를 청해다가 조선식으로 맛있는 음식도 해주었다. 그 집에 가서 먹던 토끼고기를 넣은 두부지지개와 쫀드기떡이 참말로 별맛이였다. 쫀드기라는 풀은 잎에 보드라운 털이 난것이였는데 냄새도 없고 독도 없었다. 손목사의 집에서는 평양에 있을 때부터 그 풀로 떡을 해먹었다고 하였다. 그날 내가 목사의 집에서 먹은 떡은 북산공원에 가서 뜯어온 쫀드기로 만든것이였다.

손정도에게는 아들 둘에 딸 셋이 있었다. 길림에서 우리의 운동에 관여한것은 둘째 아들 손원태와 막내딸 손인실이였다.

손인실은 그때 황귀헌, 윤선호, 김병숙, 윤옥채 등과 함께 조선인길림소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내가 청년학생운동을 할 때와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있을 때 나의 심부름을 많이 들어주었다.

하루는 간수가 새 수인 한사람을 우리 감방에 던져넣고 갔다. 어찌나 심한 고문을 받았던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려신청년회 조직부장 강명근이였다. 1929년 봄에 군벌당국에 갑자기 체포되여 생사를 알길 없던 그를 감옥에서 만나게 되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그가 체포된것은 종파분자들의 허위밀고때문이였다. 강명근은 주중청총사건때문에 종파분자들의 보복을 받은것이다.

종파분자들은 려신청년회 대표들이 지창자에서 열린 주중청총모임에서 탈퇴하여 자기들의 무모한 행동을 폭로하는 성토문을 낸데 대하여 앙심을 품고 모해하던 끝에 교하에서 한 청년이 병으로 죽게 되자 강명근네가 그 청년을 독살한것처럼 군벌당국에 밀고하였다.

나는 애매하게 처형을 당하게 되였다고 눈물을 흘리는 강명근에게 혁명을 하겠다고 큰뜻을 품고나선 청년이 그쯤한 일에 의기를 꺾이워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사람이 죽기를 각오하면 못할 일이 없으니 군벌당국과 끝까지 싸워서 죄가 없다는것을 증명하라고 고무해주었다.

강명근은 그후 재판정에서 우리가 말해준대로 죽기를 각오하고 견결하게 싸웠다.

그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전기간 깨끗하게 살다가 해방된 다음 조국에 돌아와 우리 당의 과업을 받고 우당과의 사업을 성실하게 하였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강명근이 살아서 멀지 않은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그래서 그에게 사람을 보내여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다.

이 기별이 강명근에게 큰 충격을 주었던것 같다. 그는 나와의 상봉을 앞두고 안타깝게도 뇌출혈을 하였다.

그때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길림시절을 두고 뜨거운 회포를 나누었을것이다.

나는 감방에서 우리 나라의 민족해방투쟁과 공산주의운동이 남긴 경험과 교훈도 분석해보고 다른 나라의 혁명운동경험도 더듬어보았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시위투쟁도 해보고 파업투쟁도 해보고 의병투쟁도 해보았으며 독립군운동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투쟁은 실패의 운명을 면치 못하였다.

운동도 많이 하고 피도 많이 흘리였는데 왜 투쟁은 승리하지 못하고 매번 주저앉기만 하였는가?

우리 나라 반일투쟁대렬안에는 파벌이 형성되여 민족해방투쟁에 커다란 해독을 끼쳤다.

반일항쟁의 첫 봉화를 들고 8도강산을 주름잡던 의병의 대오는 상하일치를 이룩하지 못하고 분렬되여있었다. 왕조정치의 회복을 바라는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기성질서의 개혁을 부르짖는 평민출신의병들사이에는 심각한 리념상의 대립과 모순이 존재하고있었는데 이것은 의병의 전투력을 높일수 없게 하였다.

구제도의 복구를 절대리념으로 삼고있던 일부 의병장들은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기 위해 전공을 다투는 싸움까지 하여 대오를 분렬시키였다.

평민출신의 의병장들은 유생출신의 의병장들과 련합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의병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독립군의 실태도 이와 별로 다른것이 없었다. 독립군은 조직자체에서부터 분산성과 산만성을 드러냈다.

만주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여러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이 3부로 통합된 다음에도 파쟁은 계속되였다.

3부의 통합으로 국민부가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 상층은 국민부파와 반국민부파로 갈라져 권력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은 이렇게 여러파로 갈라져 큰 나라들을 쳐다보면서 쓸데없는 말싸움만 하였다.

독립운동의 지도적위치에 있던 인물들가운데는 중국을 등에 업고 조선의 독립을 이룩해보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쏘련의 힘을 빌어 일본을 타승해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미국이 조선독립을 《선사》해줄것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사대주의를 하게 된것은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은데 있었다. 민족주의운동은 인민대중을 떠나 상층운동에 머물러있었기때문에 튼튼한 지반을 가질수 없었으며 인민들의 지지도 받을수 없었다.

인민들과 리탈되여 상층의 몇몇 사람들끼리만 모여앉아 말공부와 권력다툼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대중을 혁명투쟁에로 불러일으키지 않은 본질적약점은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속에서도 나타났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속에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결속하며 투쟁에 동원할 대신 인민들과 동떨어져 말공부나 하고 《령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만 하였다.

초기공산주의운동은 운동내에 발생한 종파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우리 나라 종파분자들이란 민족주의계렬의 부르죠아지나 소부르죠아인테리들과 몰락한 봉건귀족, 량반출신 인테리들로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후 로동운동이 급속히 앙양되고 맑스ㅡ레닌주의가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있는 시대적추세에 편승하여 맑스주의간판을 들고 혁명의 조류속에 휩쓸려들어온 사람들이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파벌을 형성하고 《령도권》쟁탈을 위한 권력싸움을 벌렸다.

종파분자들은 온갖 사기협잡과 권모술수에 매달리다 못해 폭력단까지 만들어가지고 깡패들처럼 서로 치고받는 싸움까지 벌리였다.

종파분자들의 분파책동으로 하여 결국 조선공산당은 자기 대렬의 통일을 보장할수 없었으며 일제의 탄압을 이겨낼수 없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자체로 당을 꾸리고 혁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파가 《정통파》라고 하면서 감자도장까지 만들어가지고 국제당의 승인을 받으러 돌아다니였다.

나는 우리 나라 민족주의운동과 초기공산주의운동의 이러한 실태를 분석하여보고 혁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되겠다는것을 심각히 느끼게 되였다.

이로부터 나는 자기 나라 혁명은 자신이 책임지고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승리할수 있으며 혁명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였다. 이것이 지금 말하는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되였다.

나는 감방에서 앞으로 조선혁명을 어떻게 이끌고나갈것인가 하는데 대하여서도 여러모로 생각해보았다.

일제침략자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어떤 형식과 방법으로 싸워야 하며 반일력량을 어떻게 하나로 결속하여야 하겠는가, 혁명의 령도기관으로서의 당은 어떻게 창건하여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심을 하였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가면 무슨 사업부터 착수해야 하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하였다.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구체적현실과 사회계급적제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무장한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자면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하며 로동자, 농민, 민족자본가,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반일애국력량을 반일의 기치하에 묶어세워 투쟁에 불러일으키고 파쟁이 없는 새로운 혁명적당을 창건하여야 한다는 투쟁방침을 확정하였다.

조선혁명을 수행해나가는데서 우리가 견지하여야 할 립장과 관점이 명백해지고 로선과 방침도 뚜렷하게 머리속에 그려볼수 있게 되니 하루빨리 감옥에서 나가야겠다는 충동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나는 출옥날자를 앞당기기 위한 투쟁을 벌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학생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온 동무들과 함께 출옥투쟁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짜고들었다.

그때 우리가 생각한 투쟁방법은 단식이였다.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비장한 결심을 하고 투쟁에 들어섰다.

단식투쟁을 시작하기전까지만 해도 나는 잡범들까지 망라된 이번 투쟁에서 행동의 통일을 보장하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단식이 시작되자 매 감방에서 음식이 그대로 되돌아나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그릇의 음식을 놓고 싸우던 잡범들까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학생사건》으로 들어온 우리 동무들이 소리없이 교양사업을 해온 보람이 컸다.

감옥밖에 있는 동무들도 우리의 출옥투쟁을 적극적으로 방조해주었다. 우리 동무들은 옥중투쟁에 호응하여 길림감옥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폭로하면서 사회적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군벌당국은 굳게 단결된 우리의 투쟁앞에 굴복하고야말았다.

나는 1930년 5월초에 길림감옥을 나섰다. 궁륭식으로 된 감옥문을 나서는 나의 가슴은 신념과 열정으로 차고넘치였다.

나는 감옥에서 초기공산주의운동과 민족주의운동을 총화하였고 그 교훈에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앞길을 설계하였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는 평양감옥에서 민족주의운동으로부터 공산주의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모색을 하였고 나는 이렇게 길림감옥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조선혁명의 앞길을 구상하였다.

불행한 망국노의 아들들이여서 아버지도 나도 감옥안에서 나라와 민족의 전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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