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집권과 갑술참사라는 대량학살 [남녘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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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93회 작성일 21-06-0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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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5일 <남녘동포>

 

이성계의 집권과 갑술참사라는 대량학살

이성계가 집권한 3일 후인 1392년 7월 20일 일단 전국의 고려 왕씨일족을 강화도와 거제도에 강제 집결시킨다.
그러고나서 1394년 4월 15일 형조전서 윤방경을 강화도에, 5일 후에는 형조전서 손흥종을 거제도에 각각 보내 그곳에 가두어두었던 왕씨들을 바다에 처넣어 모조리 죽인다. 이것이 갑술참사다. 대량학살인 것이다.
강화도와 거제도에 강제로 끌려가지 않은 왕씨들도 그후 드러나는 족족 모조리 살해했다.
때문에 여기에 끌려가지 않은 고려 왕씨들은 살아남기 위해 왕씨 성을 버리고 왕자가 들어있는 글자인 김(金), 전(田), 전(全), 옥(玉)자 등으로 변성명하거나 여러 계기로 왕씨 성을 받은 사람들은 본래 성을 되찾거나 어머니성으로 자기 성을 고쳤다.
다만 여기서 예외로 되었던 것은 당시 조선왕조정부에서 임명한 고려왕실의 사당을 지키는 왕씨만은 왕씨전멸조치에서 제외되었다.
이 사건에 대하여 당시 민중들과 조선의 관리들 조차도 왕씨들이 대량참살당하는 것에 동정심이 일어 왕씨들을 많이 숨겨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고려왕족 출신 왕휴 등이 있었다. 경주판관 김여지가 왕휴를 숨겨주었는데 20년이 지난 후 왕휴의 아들 걸오미가 호패법 실시 때 적발되어 문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이 왕휴의 아들 걸오미가 적발되어 처형해야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태종 이방원이가 그를 처형하면 새삼스레 불집을 일으키는 것으로 되며 점차 안정되어가는 새 왕조의 운명에 어두운 그늘을 던지게 된다고 생각하여 그를 석방하도록 지시한 일도 있었다.
이 갑술참사에 대한 부분은 <태종실록 권26 13년 11월 정유>의 기사에서도 언급이 되어 있다. 태종실록에 보면 고려 왕씨를 모조리 죽인것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라 한두명의 대신이 초창기에 민심을 하나로 모이게 하자고 한 계책일뿐이며 그때 그 자신은 나이가 어려서 고전을 많이 보지 못한 탓으로 왕씨를 몰살하자고 한 주장을 막지 못하였는데 그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스럽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새 왕조에서 벼슬할 것을 거부하고 정계를 떠나 가족과도 생이별하여 두문동에 들어간 72명의 고려의 신하들 대부분을 가혹한 고문으로 학살했다.
이외에도 1392년 7월 28일 이성계의 즉위를 세상에 알리고 17개조의 시정조치를 단행할 때 56명에 달하는 다섯등급의 탄압대상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 명단에 실린 고려 관리들에게 신분을 강등하고 귀양을 보냈는데 귀양간 많은 이들이 가혹한 고문과 형벌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하여 북녘의 역사서 <조선단대사 17 리조사 1>에서는 "물론 동서방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왕조교체와 관련하여 학살된 관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고려와 이조의 왕조교체를 통하여 그토록 많은 왕족과 관리들이 집단적으로 처형된 예는 일찌기 없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남녘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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