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담선생 추도식 열려 [민플러스]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50회 작성일 20-08-25 15:33

본문

 

강담선생 추도식 열려

  • 기자명

 김장호 기자 

 

 

2차 송환대상 장기수 또 눈을 감다

▲ 강담선생 [사진 : 추모집 중에서]

 

▲ 강담선생 [사진 : 추모집 중에서]

 

 

▲ 2020년 8월 23일(토) 오후 4시.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서 통일애국열사 강담 선생의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 민플러스]

 

▲ 2020년 8월 23일(토) 오후 4시.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 207호에서 통일애국열사 강담 선생의 추도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 민플러스]

 

통일애국열사 강담 선생 민족통일장이 8월 23일 토요일 오후 4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열렸다. 선생은 2차 송환 대상으로 송환날짜만 기다려왔다. 그러나 결국 폐암이라는 병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선생을 떠나보내는 자리에 많은 인파가 참석했다. 

▲ 강담선생 약력보고를 하고 있는 이정태 민자통 사무처장 [사진 : 민플러스]

 

▲ 강담선생 약력보고를 하고 있는 이정태 민자통 사무처장 [사진 : 민플러스]

 

민자통 이정태 사무처장이 선생의 약력을 보고했다. 약력만 보아도 분단의 비극과 선생의 통일을 향한 뜨거운 삶이 심금을 울린다. 

강담 선생 약력

1933.10.12. 함경남도 홍원군 산양리에서 부친 강용준 님과 모친 최귀인 님  의 7남매 중 다섯째로 출생.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문전에 학교가 있어도 못 가고 소를 기르며 지냄
1945.      해방 후 학천인민학교 3학년 편입
1950.      운학중학교 입학, 전쟁 발발
1954.      졸업과 함께 군 입대(당원이 됨)
             금강산과 해금강 일대에서 8년 간 복무
1961.      청진수산사업소 배치 
1961.10.  4살 연하의 박원옥 님과 혼인
1962.      큰딸 선자, 이듬해 길모 얻음 
         진남포 해양고등학교 입학, 2년 후 항해사 자격증 획득, 마도로   스 활동 
1964.08.   졸업과 동시에 중앙당 소환

1965.03.05. 남에 내려올 당시 부인이 셋째 임신 중이었음 
            울릉도 앞바다에서 체포
            미 합동수사부로 끌려가고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6~7개월 간 고문
            (공산당 대단하다. 김일성 대단하다. 사람을 이렇게 잘 고르다니)
            선장과 부선장 사형 집행
           항해사이자 당책이었던 선생은 1심 사형, 상고심 무기로 감형, 서대문형무소/대전교도소 이감
1968.     광주교도소 이감
1971.     고문과 구타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음

1988.12.21. 특사(24년)로 풀려남(56세), 전남대 임경순 교수 신원보증
              출소 후 경기도 광주 가구제작사 근무
1989.    건설회사 잡부, 아파트와 성당 경비로 일하다 14살 연하의 부인  최화자 님과 재혼
2001.02.06. 2차송환 요구
2005.         뇌졸중으로 쓰러짐(왼쪽 팔과 다리 마비)
2012.         전립선암 진단
2017.         다시 뇌졸중
2020.01.     폐암 4기 진단받고 투병  
2020.08.21. 저녁 9시 43분 운명
범민련 서울연합 고문, 통일광장, 민가협, 양심수후원회에서 통일운동 하심

 

▲ 강담선생 추도시를 낭송하고 있는 통일광장 양희철 선생 [사진 : 민플러스]

 

▲ 강담선생 추도시를 낭송하고 있는 통일광장 양희철 선생 [사진 : 민플러스]

 

통일광장 양희철 선생이 추도시를 낭송했다. 아래는 강담선생 추모시의 일부이다.

 

아름답게 사시다
아름답게 가신님
우리의 강담선생님
.............

질긴 생명의 끈 안고 퇴옥살이 접어라
함경도 사나이 굳센 의지 펼쳐라
통일의 씨앗 닿는 곳 마다 뿌려라
햇볕이 없으면 햇볕을 만들고
물이 없으면 물통질해 부어라

강담선생 추도사.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양심수 후원회 이경원 대표. 김혜순 양심수 후원회 회장. 김동순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 이미숙 민중민주당 광주시당 위원장 [사진 : 민플러스]

 

강담선생 추도사.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양심수 후원회 이경원 대표. 김혜순 양심수 후원회 회장. 김동순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 이미숙 민중민주당 광주시당 위원장 [사진 : 민플러스]

 

조객들은 선생의 추모영상을 보며 숙연해졌다. 그리고 양심수 후원회 추도사를 이경원 양심수 후원회 공동대표가 대독했다. 이어 김혜순 양심수 후원회 회장. 김동순 범민련 서울연합 의장의 추도사가 이어졌고 이상훈 민중민주당 대표 추도사를 이미숙 광주시당 위원장이 대독했다.

한결같이 원칙과 강직함을 잃지 않았던 고인의 삶, 일상과 사람관계에서 격의없고 정이 넘친 만인의 벗으로서의 선생을 기억했다. 언제나 사람들을 챙기고 유머를 잃지 않았던 선생의 삶을 추억했다.

▲ 희망새 추모공연.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르고 있다. [사진 : 민플러스]

 

▲ 희망새 추모공연.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르고 있다. [사진 : 민플러스]

 

 

▲ 추모발언을 하고 있는 강담선생의 고향선배 이근엽 선생 [사진 : 민플러스]

 

▲ 추모발언을 하고 있는 강담선생의 고향선배 이근엽 선생 [사진 : 민플러스]

 

▲ 이근엽 선생의 추도문 [사진 : 민플러스]

 

▲ 이근엽 선생의 추도문 [사진 : 민플러스]

 

희망새 추모공연에 이어 뜻하지 않게 고향 선배라는 이근엽 선생이라는 분이 추모발언을 하였다. 자신은 강담 선생의 고향 선배지만 강담은 인민군, 자신은 국방군의 길을 택했다면서 강담선생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추모사는 사회를 보던 류경완 코리아국제평화포럼 공동대표가 낭독했다.

▲ 호상인사를 하고 있는 김호현 양심수 후원회 이사, 전 회장) [사진 : 민플러스]

 

▲ 호상인사를 하고 있는 김호현 양심수 후원회 이사, 전 회장) [사진 : 민플러스]

 

▲ 유족인사를 하고 있는 조카 [사진 : 민플러스]

 

▲ 유족인사를 하고 있는 조카 [사진 : 민플러스]

 

▲ 강담 선생의 배우자 최화자 선생 [사진 : 민플러스]

 

▲ 강담 선생의 배우자 최화자 선생 [사진 : 민플러스]

 

강담 선생 장례식은 김호현 양심수 후원회 이사의 호상인사에 이어 유족인사로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에 조카가 유족인사에 나서 “우리를 강선자, 강길모로 생각해 달라며 통일의 그날에 북녘 가족들을 함게 만나고 싶다”며 조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배우자인 최화자 선생은 말없이 눈물만 훔쳤다.  [기사와 사진출처 / 민플러스]

 

관련기사

 

 

추천 0 비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2016-2017 KCNCC(Korean Canada National Coordinating Council). All rights reserved

E-mail : kcncc1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