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소사하의 가을

 

우리는 량강구에 돌아오자 소사하에서 남만원정에 참가하지 않은 나머지인원들까지 모두 불러다가 유격대가 창건된후 반년동안의 사업을 총화하였다. 주되는 내용은 물론 남만원정과 관련된것이였다. 유격대원들은 우리의 무장대오가 반년사이에 비약적으로 성장발전하였고 그 과정에 유격전으로써도 능히 일제를 타승할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였다는것을 한결같이 인정하였다.

우리는 그 총화회의에서 유격투쟁을 새로운 단계에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부대앞에 다음과 같은 몇가지 과업을 제기하였다.

첫째, 반일인민유격대의 근거지를 왕청지구로 옮길것이다.

둘째, 중국인항일구국군과의 사업을 더욱 심도있게 전개할것이다.

셋째, 동만일대에서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한 유격투쟁을 옳게 지도하며 혁명근거지창설을 다그치고 그것을 튼튼히 지켜낼것이다.

이상의 세가지 문제가운데서 제일 심각하게 론의된것은 반일인민유격대의 활동근거지를 왕청으로 옮길데 대한 문제였다.

이 문제 한가지를 가지고 안도, 연길, 화룡에서 온 군정간부들과 함께 며칠동안 내처 토의를 거듭하였다.

안도의 동무들은 활동거점을 왕청으로 옮기는데 대해서 반대하였다. 안도에서 창건된 유격대가 안도에 있어야지 무엇때문에 왕청으로 가겠는가, 유격대가 왕청으로 가고나면 안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고 하면서 난색을 지었다. 편협한 지역감정에서 탈피하지 못한 소박한 고집이였다.

그대신 연길과 화룡에서 온 동무들은 유격대의 효시이고 원종장인 안도부대가 조선사람들이 집결되여있는 간도한복판으로 자리를 옮기는것은 전략적견지에서 보나 지역적조건으로 보나 응당하고 시기적절한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전투력이 제일 강한 안도부대가 왕청에 가게 되면 연길, 훈춘, 화룡을 비롯한 린접현의 유격부대들의 활동에서도 큰 전변이 일어나게 될것이라고 확언하였다.

왕청이 지역적으로 《명당자리》라는것은 안도의 동무들도 다 인정하고있었다. 왕청은 우선 국내와의 거리가 가까와서 좋았다. 대안의 륙읍지구는 《길림바람》이 많이 들어간 고장들이여서 장차 유격투쟁에 인적, 물적지원을 줄수 있는 믿음직한 원천지로 될수 있었다. 우리는 륙읍지구를 발판으로 하여 국내혁명을 앙양시킬수 있었다. 왕청일대의 군중들은 뛰여난 투쟁력과 혁명성을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독립군의 무장투쟁사에서 최고의 봉우리라고 볼수 있는 청산리전투나 봉오골전투를 지원하는데서 유감없이 발휘되였다. 왕청은 북로군정서의 활동기지였고 여기에서 활동한 수백명의 독립군과 무관학교의 학생들은 다 이 지방 사람들이 가꾸어낸 오곡으로 밥을 지어먹었다.

그러나 왕청이 좋은 고장이라고 하여 무턱대고 그리로 옮겨갈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안도현에 근거지를 잡고 우리자신의 힘으로 유격투쟁을 개척해갈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구국군과 같이 합법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살금살금 조선사람부대들을 더 늘여나가겠는가 하는 두가지 방안을 놓고 련일 토의를 심화해나갔다.

나는 구국군과의 공동행동때문에 우리가 활동에서 좀 구속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피로써 얻어낸 반일인민유격대의 합법화를 더 공고히 하고 재만조선민족을 제2의 일본인으로 보는 중국의 형제들에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앞잡이도 아니고 척후병도 아니며 그네들이 친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의 무장부대는 친일이 아니라 철저한 반일을 한다는것을 보여주는것이 중요하다고 간주하였다.

우리는 결국 일정한 기간 구국군과 함께 활동하면서 유격대의 합법화를 계속 고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실지 투쟁을 통하여 영향력을 확대하여 무장대오를 늘여가다가 그것이 커진 다음 서로 합류하자는 안을 채택하였다.

이런 안을 확정한 다음에는 동만의 여러 지방들에 사람들을 뽑아보냈다. 연길에도 보내고 화룡에도 보내고 훈춘에도 보내고 라자구의 구국군부대들에도 유능한 공작원들을 여러명 파견하였다. 왕청에는 별동대를 하나 더 만들어서 들여보냈다. 김일룡은 안도에 떨궈두었다. 백수십명에 달했던 우리 부대는 또다시 40명선으로 줄어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부대를 털어서 다른 현들에 사람들을 자주 보내게 되자 동만특위의 간부들도 만족해하였다. 그들은 우리 부대가 기본부대이니만치 쫄쫄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다른 지방의 유격부대들을 보강해달라고 여러차례에 걸쳐 요구하였다.

우리 부대가 소사하를 떠나 남만원정의 길에 오르던 그때로부터 넉달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량강구의 강하와 산야에는 하루가 다르고 이틀이 다르게 가을빛이 짙어갔다. 밤을 자고 나면 여기저기에 락엽이 깔리고 그우에 서리가 내려 미구에 닥쳐올 대륙의 사나운 겨울을 예고해주었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차지니 은근히 병상에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되였다. 그러나 생각뿐이였지 소사하에 다녀올 엄두는 내지 못하였다.

나는 토기점골을 다녀오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어머니와의 상봉을 계속 뒤로 미루었다.

북만으로 출발할 날자가 박두해오자 차광수는 나에게 어디서 구해들였는지 알수 없는 첩약꾸레미를 가져다주면서 토기점골에 다녀오라고 권고하였다. 내가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김성주답지 않다고 비난하면서 우리 대장이 자기 어머니도 몰라보는 사람이라면 다시는 말도 걸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여 나는 소사하로 떠나게 되였다.

첩약을 들고 가면서도 걱정되는것은 어머니가 이 약을 보시면 또 쓸데없는 일에 마음을 쓴다고 꾸짖지나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차광수가 구해보내는 약이라고 하면 어머니도 기뻐하실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내가 소사하에 있을 때 사가지고 간 좁쌀 한말은 벌써 거덜이 난지도 오랬을것이였다. 어머니가 일을 못하시는 형편이니 지금은 무슨 돈으로 어떻게 가계를 유지해가고있는지. 어머니는 산 사람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어머니나 동생들이 없었던 셈치고 집생각을 말라고 오금을 박았지만 사람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나 동생들을 잊고 집생각을 하지 않는다는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는것은 아니였다.

그리 무겁지도 않은 첩약꾸레미를 들고 덜렁덜렁 집으로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소사하가 가까와지자 점점 더 무거워지는것이였다. 어머니의 병이 혹시 더 도지지나 않았을가 하는 불안도 불안이지만 제일 께름직한것은 량사령과의 합작을 완전히 성사시키지 못한채 남만에서 돌아온 사실이였다. 어머니가 알면 못내 섭섭해하실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중환에 계시면서도 나의 남만행을 그토록 독촉한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친구였던 사람과 합작을 하러 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고 대견해서였을것이다. 어머니는 젊은 사람들이 주의만 따지면서 독립운동의 선배들과 등을 돌려대고 지내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것은 어머니의 병세가 어떤가 하는것이였다. 맹물같은 미음조차 잘 삭이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갔으니 그 사이 차도가 없었다면 지금쯤은 중태에 빠져 이전보다 더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계시지나 않겠는지 나로서는 이것도저것도 쉽게 가늠할수가 없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가슴을 조이는 불안스러운 생각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토기점골의 낯익은 외나무다리를 건느면서도 그런 생각에서 헤여나오지 못하였다.

내가 그 외나무다리를 건늘 때면 매번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문을 열어젖히군했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그것이 몇번째 아들인가를 가려내는 특별한 감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만은 예상외로 문도 열리지 않았고 굴뚝에 저녁밥을 짓는 연기도 오르지 않았으며 땔나무나 구정물버치를 들고 부엌문으로 들락날락하는 동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심장의 피가 일시에 얼어드는것 같은 불안과 긴장감을 느끼며 가까스로 문고리를 잡아당기였다. 그리고 문을 열기 바쁘게 토방돌우에 그대로 주저앉을번하였다. 어머니의 침상이 있던 자리가 텅 비여있었던것이였다. 내가 그만 걸음이 늦었구나 하는 후회가 번개같이 머리를 치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철주가 소리없이 다가와 내 어깨에 왈칵 매여달리였다.

《형, 왜 인제야 오우?》

동생은 몸부림을 치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나의 가슴에 마구 비비였다. 그리고는 목갈린 소리로 어린애들처럼 엉엉 울었다.

이번에는 영주동생이 돌덩어리처럼 난데없이 날아들어 나의 왼쪽옆구리에 매여달리였다.

나는 토방돌우에 첩약꾸레미를 떨어뜨리며 통곡하는 두 동생을 으스러지게 그러안았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모든것을 죄다 설명해주고있었으니 어머니의 생사여부에 대해서는 더 물을 필요조차 없었다. 어쩌면 내가 없을 때에 이런 불행이 생길수 있단말인가. 림종의 마지막순간에 이 아들의 얼굴을 바라볼 모성의 마지막행복마저 우리 어머니에게는 차례질수 없었단 말인가. 가난속에 태여나 일생을 가난으로 살아오신 어머니! 수난당한 내 나라의 비운을 생각하여 남편의 희생앞에서도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키던 나의 어머니, 자기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한평생 온 넋과 육신을 깡그리 바치다가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이 아들이 사사로운 인정에 빠져서 큰 일을 그르칠가봐 늘 념려하시더니 혁명하는 아들에게 짐이 된다고 어머니는 그렇게도 서둘러 눈을 감으신것이나 아닌가.

나는 이전날 어머니가 나를 마지막으로 훈계하실 때 잡고계시던 그 문설주를 손으로 쓸어만지며 설사 그때보다 더 엄한 책망을 듣는다 하더라도 이 문앞에서 살아계신 어머니를 다시 한번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철주야,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없었니?》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사립문을 열고 뜨락에 들어선 김씨녀인이 철주를 대신하여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나보고 이런 말을 했다우. 〈…내가 죽은후에 우리 아들 성주가 오거든 내가 대하듯 해주세요. 왜놈들이 살아있고 조선을 독립하지 못한채 오거든 내 무덤을 파가지도 못하게 해야 해요. 아니, 문전에도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지요. 그렇지만 내 자식이라고 자랑은 아니지만 성주는 싸우다가 그저 돌아오지는 않을거예요.〉이런 말을 하시고는 나더러 문을 열어달라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저기 외나무다리가 있는 쪽을 점도록 바라보더구만.》

김씨녀인의 말은 먼 《하늘나라》에서 울려오는 소리처럼 희미하게 들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매 말마디가 안고있는 심오하고도 비통한 뜻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죄다 똑똑히 깨달을수가 있었다.

나는 두 동생을 부여안은채 외나무다리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아들을 그리는 어머니의 심정, 사랑하는 아들을 보지 못한채 영면하는 순간의 어머니의 심정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상상의 대문에 들어서기도전에 오열이 급작스레 폭발하였다.

한창 울다가 고개를 쳐드니 김씨녀인이 눈물어린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있었다. 그 눈빛이 얼마나 부드럽고 사려깊었던지 나는 하마트면 어머니의 눈이라고 착각할번 하였다.

《어머니, 그동안 우리 어머니를 돌보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나는 가슴이 찢기는것 같은 슬픔과 고통속에서도 잠시나마 리성을 되찾고 마지막순간까지 어머니의 길동무가 되여준 김씨녀인에게 감사를 드리였다.

그러자 김씨녀인은 더 슬프게 흐느껴울었다.

《고생은 무슨 고생이겠소. 나는 자주 와보지 못했소. 우리가 잘 돌보지 못하다나니 어머니의 곁에는 머리를 빗어드릴 사람도 없었다우. 아우들도 혁명사업을 하느라고 집에 붙어있지 못했소. 어느날 어머니는 나보고 사내아이들모양으로 머리를 빡빡 깎아달라구 하지 않겠소. 머리가 가렵다고 하면서… 나는 그런 부탁을 받고도 차마 가위질을 할수가 없었소. 어머니의 머리야 얼마나 소담하고 칠칠했소. 내가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했더니 어머니는 소원대로 해달라고 간청하지 않겠소. 머리만 가렵지 않으면 하늘로 날아갈것 같다구… 그래서 그 아까운 머리를…》

김씨녀인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소리를 내여 울었다.

나는 차라리 그 말을 듣지 말았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 비통한 최후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오장을 갈기갈기 찢어내는것 같았다. 일생을 바쳐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해오신 어머니인데 그 품에서 자라난 자식들에게는 림종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곁에서 머리를 빗어드릴 효성마저 없었단 말인가.

나는 전에 무송에서 살 때 내 나이또래의 소년이 병든 어머니를 업고 남전자에서부터 소남문거리까지 땀을 철철 흘리며 걸어와 의원을 찾느라고 애쓰던 광경을 목격한 일이 있다. 그때 우리는 모두 그 소년을 보면서 효자라고 하였다. 김씨녀인의 말을 듣고나니 어쩐지 땀을 철철 흘리던 그 소년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그 아이에 비기면 나는 불효자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도대체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무엇인가. 어렸을적에는 어머니에게 따뜻한 아래목도 권하고 우물터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언손을 입김으로 녹여드리기도 하였다. 아침이면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고 하면서 닭모이도 주고 초롱으로 물을 퍼다 드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혁명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머니를 위해 해드린것이 별로 없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올리사랑은 없다고 한 옛 사람들의 말은 바로 나를 념두에 두고 지어낸 명제일지도 모르겠다. 올리사랑이 없다고 한 말은 참으로 현명한 말이다. 나는 아직 자식들에게 바치는 부모들의 사랑을 릉가하는 그런 효성으로 부모들을 섬기고 모신 자식들이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철주야, 어머니가 너희들에게 남긴 말씀은 없었니?》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남긴 유언이 어찌 그것뿐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철주에게 또 물었다.

철주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문지르고 목쉰 소리로 대답했다.

《형을 잘 도와드리라고 했어요. 우리가 형을 도와드리구 형과 같은 혁명가가 되면 지하에 가서도 편히 잠들수 있다구…》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모든 정신력은 마지막 순간에도 오직 혁명 하나만을 위해 소모된것이였다.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그달음으로 어머니의 묘소에 찾아갔다.

느릅나무고목이 외따로 서있는 언덕받이 한옆에 수박무늬 모양으로 떼장을 덮은 어머니의 묘소가 있었다.

나는 군모를 벗어쥐고 두 동생과 함께 묘앞에 절을 드리였다.

(어머니, 성주가 왔습니다. 불효막심한 이 아들을 용서해주십시오. 남만에 갔던 걸음이 늦어져서 이제야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땅우에 주저앉아 이런 속대사를 하고있을 때 철주가 느닷없이 묘우에 엎드려 손으로 떼장을 우벼내였다.

《뭘 그러고있느냐?》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철주는 대답대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량강구에서 내가 가지고 온 첩약봉지들을 봉분밑에 무데기로 파묻는것이였다.

동생의 그 말없는 행동이 그만 내 가슴에 연기처럼 서려있던 비애를 사정없이 건드려놓고야 말았다. 나는 봉분우에 엎드려 오래도록 서럽게 울었다. 혁명가로부터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온것이다.

지상만물이 그 무덤 하나로 응결되고 세상만사가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하나의 비극으로 압축된것같은 순간이였다. 그러나 머리우에서는 푸르디푸른 가을하늘이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명랑하게 대지를 굽어보고있었다. 어쩌면 저 하늘이 우리의 슬픔앞에서 저렇게도 태연할수 있을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것은 망국의 년륜이 스물두돌기나 감긴 1932년의 음산한 여름에 있었던 비극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는 좀더 오래 이 세상에 살아있었을것이다. 어머니의 병은 고생끝에 생긴것이였으며 그 고생은 망국의 시운이 빚어낸것이였다.

자식들을 위해 바친 어머니의 로고는 참으로 헤아릴수 없었다. 내가 어머니를 위해 기울인 효성이 열이라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 부은 사랑은 천이나 만으로도 헤아릴수 없을것이다.

나는 지하활동을 하던 시기 4~5명의 공청원들과 함께 무송시가에서 적의 포위에 든적이 있었다. 포위를 헤치고 싸움을 하면서라도 현성밖으로 나가야겠는데 우리에게는 무기가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리허에 있는 우리 동무들한테 가서 무기를 받아올수 없겠는가고 부탁하였다.

어머니는 내 청을 쾌히 받아들이였다.

《그까짓것 못하겠니. 내가 가서 가져오마.》

말리허에 간 어머니는 우리 동무들한테 권총 두자루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때 말리허의 우리 동무들은 어머니의 요구대로 당기면 나갈수 있게 권총을 장탄까지 해주었다. 어머니는 그 싸창들을 소고기갈비속에 넣어 이고 성문을 대담하게 통과하였다. 성문앞에서 경찰들이 그 소고기함지를 가리키며 《그건 뭐야?》하고 물었으나 어머니는 태연하게 《소고기웨다.》라고 대답하였다. 경찰들은 함지우에 씌워놓은 종이장만 들춰보고 어머니를 그대로 통과시켰다.

나는 장탄을 하고 안전장치까지 풀어놓은 권총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 큰일날번했구만요. 이 총들에 총알을 왜 재웠습니까?》

《내가 너희 동무들을 보고 재워달라구 했다. 놈들이 이 함지를 수색하면 답새기자구 말이다. 기껏해야 두놈이나 세놈쯤 달려들겠지. 접어들면 한놈이라도 쏘고 나도 죽을 생각이였다.》

어머니의 그 말씀속에는 우리의 체험이나 천박한 사고방식으로써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고결한 넋이 깃들어있었다.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한 리해와 열렬한 공감이 없이는 감히 흉내도 낼수 없는 용기였고 참사랑이였다.

우리가 구안도에서 마춘욱의 집 곁방살이를 하고있을 때였다. 하루는 우리 동무들이 권총을 손질하다가 오발해서 어머니의 다리를 다치였다. 치료를 잘하지 않으면 생명을 건드릴수도 있는 위험한 총상이였다.

어머니는 그날부터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였다. 누가 물으면 아침에 물을 던지러 나갔다가 락상하여 다리가 골절이 됐다고 하였다. 상처도 보이지 않고 이불을 쓰고 누워있으면서 비밀리에 형권삼촌의 간호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원망하거나 오발을 한 사람에게 언짢은 기색을 지어보이지 않았다.

오발사고를 낸 동무는 너무나 미안해서 죽으려고까지 하였다.

어머니는 그 소문을 듣자 대노하여 《그러면 못쓴다.》고 꾸짖었다.

《너희들이 총이 서툴어서 그런것인데 그래도 다행이다. 사내라는것들이 그만한 일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생각일랑 말구 비밀들이나 잘 지킬 궁리를 해라. 이 비밀이 새면 너희들도 큰일이 나고 이 집에도 큰일이 난다. 그리구 너희들은 성사를 못한다.》

어머니는 다리의 총상보다도 우리에게 무기가 있다는 사실이 경찰에 알려지는것을 더 두려워하였다.

마춘욱이네도 이 오발사고에 대해서는 외부에 루설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의 품성가운데서 제일 좋은것은 나의 동무들을 자기 자식과 같이 사랑하는 점이였다. 어머니는 나의 동무들을 나와 꼭같이 대해주었다. 우리 동무들이 집에 오면 사업비도 어머니가 대주었다. 그 사업비의 원천은 재봉일과 삯빨래질로 벌어들인 돈이였다. 목재소일군들과 인삼을 캐러 다니는 계절로동자들이 광목을 끊어가지고 와서는 우리 어머니에게 옷을 해달라고 자주 주문하였다. 어머니는 그들의 옷을 해주고 하루에 70~80전씩 벌었다. 일이 잘되는 날에는 1원도 벌었다.

비록 생활은 궁색하였지만 어머니는 돈을 쓰는데서 린색하지 않았다. 그저 쌀을 사는데 필요한 돈과 타고장으로 갈 때 쓸 로자와 집세만 계산해놓고는 번 돈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동무들이 오면 밀국수 몇근에 돼지고기 몇근을 사다놓고 교즈나 수제비국을 만들어 먹이거나 사업비로 쓰라고 하면서 저축했던 돈을 다 내놓군하였다.

우리 동무들이 《어머니, 성주네도 생활이 풍족치 못한데 밑천을 다 털어서 우리한테 주면 세간살이는 어떻게 해가시자구 그럽니까?》하고 걱정하면 어머니는 《사람이 돈이 없어서 못 사는것이 아니라 명이 모자라서 못산다.》라고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나의 동무들이 몇달씩 집에 와있어도 절대로 언짢아하지 않고 시종일관 친자식처럼 변함없이 대해주었다. 그러기에 만주에서 청년운동을 한 사람들가운데서 우리 집에 며칠씩 와있다가 간 동무들은 나의 어머니를 《성주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우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일평생 혁명가들의 밥을 해주다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적에도 애국자들의 시중으로 나들이조차 다니지 못하고 바쁘게 지내던 어머니였다. 림강에서 살 때에는 매일밤 밥을 하였다. 우리가 밤에 이불을 쓰고 잠을 청할 때면 아버지의 친구들이 어느때라고 편안히 잠을 자는가고 롱을 하며 집으로 쓸어들어와 웃방에서 자군하였다. 그러면 어머니는 또 일어나서 밥을 짓군하였다.

어머니는 혁명가들의 시중을 들면서 자신도 혁명을 하였다. 어머니가 혁명활동을 시작한것은 무송에서 살 때부터였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남만녀자교육련합회 백산지구회에 들어가서 녀성들과 아동들에 대한 계몽사업을 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후에는 부녀회사업도 하였다.

어머니가 혁명의 방조자로부터 직접적인 담당자로 성장하기까지에는 아버지나 우리 영향도 많이 받았지만 리관린의 영향 또한 대단히 컸다고 말할수 있다. 그가 우리 집에 와있을 때 어머니를 남만녀자교육련합회사업에 인입하였다.

어머니가 순수한 모성애만을 가지고있었다면 나는 이처럼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어머니를 회고하지 못할것이다. 어머니가 나에게 기울인 사랑은 단순한 모성애가 아니였다. 그것은 자식을 자기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기전에 나라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를 하기전에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는것을 깨우쳐준 진실하고 혁명적인 사랑이였다. 어머니의 온 생애는 그대로 나의 가슴에 참된 인생관, 혁명관을 심어준 하나의 교과서와도 같은 생애였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대를 이어가며 싸워서라도 기어이 나라의 광복을 이룩해야 한다는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을 심어준 스승이라면 어머니는 일단 혁명을 시작한 사람은 인정에 끌리거나 곁눈을 팔지 말고 끝장을 볼 때까지 오로지 목적한바를 실현하기 위해서만 노력해야 한다는 리치를 깨우쳐준 고마운 선생이였다.

부모자식들사이에 흐르는 사랑도 맹목적인것이면 그것은 공고한 사랑이라고 말할수 없다. 사랑을 관통하는 정신이 참답고 고결해야 그 사랑은 영원하고 성스러운것으로 될수 있다. 망국의 그 시대에 나와 어머니사이를 오르내린 사랑과 효성을 줄기차게 관통한 넋은 애국이였다. 바로 그 애국을 위해 어머니는 모성으로서 자식들에게 효도를 요구할수 있는 육친적권리마저 희생시켰다.

나는 어머니의 무덤에 묘비도 세우지 못한채 토기점골을 떠났다. 그 묘소에 어머니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가 세워진것은 해방후였다. 안도현인민들이 어머니를 잊지 못해 비석을 세우고 거기에 우리 삼형제의 이름까지 새겨넣었다.

유언대로 어머니의 묘는 아버지의 묘와 함께 조국이 해방된후에야 만경대에 이장되였다.

나는 조국에 개선한 다음에도 한동안 이국땅에 묻혀있는 부모들의 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못하였다. 시국이 복잡다단하고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때문이였다. 우리가 청춘시절을 고스란히 보낸 만주의 산야에는 나의 부모들뿐아니라 나와 함께 혁명의 불바다속을 헤치다가 희생된 전우들의 유골이 수없이 묻혀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자녀들이 있었다. 희생된 전우들의 유해를 찾아오고 그들이 부탁하고 간 자식들을 해방된 내 나라 강산으로 데려오기전에는 부모들의 분묘를 옮겨올수 없다는것이 나의 결심이였다.

그런 때에 장철호가 찾아와서 부모들의 분묘를 고향에 옮겨와야 한다고 나를 설복하였다.

천묘는 자기가 책임지고 할테니 장군은 만경대에 나가서 좋은 땅을 골라 미리 묘소나 잡아두라는것이였다. 만주시절의 연고자들가운데 우리 부모들의 묘를 아는 사람은 장철호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가 그 묘들을 옮겨오느라고 말없는 수고를 많이 하였다.

내가 무장투쟁을 할 때 적들은 우리 부모들의 묘소를 파헤치려고 무던히도 검질기게 돌아쳤다. 그러나 무송과 안도의 인민들은 해방되는 날까지 적들의 눈을 속여가면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분묘를 성실하게 지키고 관리하였다. 화성의숙시절의 나의 스승인 강제하선생은 1년에 두번씩 한식과 추석명절이 올 때마다 제밥을 차려가지고 처자들과 함께 양지촌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 제도 지내고 벌초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때로부터 나는 두 동생의 보호자가 되고 가장이 되였다. 그러나 혁명은 나로 하여금 가장의 구실도 보호자의 역할도 할수 없게 하였다. 갈대가 처량하게 설렁거리는 소사하골짜기에 설음에 우는 어린 동생들을 두고 거치른 북만땅을 향해 기약도 없이 떠나가는 내 마음은 가볍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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