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동 녕 현 성 전 투

 

라자구담판후 반일부대련합판사처는 구국군과의 사업을 맹렬하게 벌리였다. 판사처일군들은 린접의 산림대들에도 침투하여 그들을 반일련합전선에 끌어들이기 위한 적극적인 공작을 하였다.

이 기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1933년 9월초 라자구부근의 로모저하라는곳에서 오의성, 사충항,채세영,리삼협을 비롯한 반일부대의 지휘관들과 함께 동녕현성(삼차구)전투방안을 토의하기 위한 련합회의를 열고 작전방침을 최종적으로 확인하였다. 회의에서는 오의성사령의 제의에 따라 우리가 작성한 작전계획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였다.

우리가 라자구담판후 동녕현성을 즉시에 공격하지 않고 두달이상의 준비기간을 설정한것은 이 전투의 의의를 특별히 중시한데 있었다. 우리는 이 전투를 항일유격대의 합법화를 완전히 실현하기 위한 돌파구로 보았고 우리와 구국군부대사이에 맺어진 통일전선에 관한 협약도 이 전투의 승패에 따라 발효를 보게 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전투를 잘하면 반일부대들과의 련합전선이 반석같은 기초우에 서는것이요, 패전으로 끝나면 라자구담판의 성과는 허실로 돌아가고 축조과정에 있던 련합전선은 붕괴를 면치 못할것이였다. 동녕현성전투를 잘못하면 우리가 혈전을 통하여 힘들게 이루어놓은 항일유격대의 군사적권위에도 오점이 생길것이였다. 구국군이 통일전선을 하다가 녹아났다고 아우성을 치는 날이면 야단이였다.

우리로서는 사실 큰 시험을 치르는셈이였다. 우리의 정찰자료와 지방조직들이 보내온 통보에 의하더라도 동녕현성에는 이시다가 이끄는 500명 정도의 일본관동군 병력과 경탄장이 지휘하는 1개 련대정도의 위만군 병력이 있고 그밖에도 위만경찰들과 자위단무력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다는것이 확인되였다. 게다가 적들은 대포를 비롯한 현대적무기들로 장비된 견고한 성새속에 들어박혀있었다.

그때 반일부대의 어떤 지휘관들은 동녕현성을 점령할수 있는 가능성은 30프로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련합회의 석상에서도 공격자의 력량이 방어자의 력량보다 3배가 되여야 한다는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군사교범의 요구인데 적의 병력에 비해 우리측의 병력이 너무 약하다고 걱정하였다.

그러나 오의성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리청천이 다녔다는 일본의 륙군사관학교 같은데서나 통할수 있는 개나발이니 참고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그러한 소극적인 림전태도를 비난하였다.

구국군이 언제인가 동녕현성을 치다가 실패한적도 있었던것만큼 일부 지휘관들이 《무적황군》을 자칭하는 일본군의 신화에 겁을 집어먹고 적을 과대평가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였다.

련합회의에서 작전방안이 채택되자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성원들은 호진민과의 련계밑에 아무 부대에서는 몇명, 아무 부대에서는 얼마 하는 식으로 동녕현성전투에 참가시킬 병력수를 부대별로 할당하였다.

우리는 왕청, 훈춘, 연길에서 각각 1개 중대 정도의 병력을 참가시키기로 하고 그들을 라자구로 불렀다.

왕청에서 내가 데리고 간 1개 중대와 백일평대대정치위원이 훈춘에서부터 인솔해가지고 온 중대는 1933년 8월말에 라자구근처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그러나 련락이 제대로 닿지 않아 연길동무들은 아쉽게도 집결장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그때 연길대대에서는 전투력이 제일 강한 최현중대가 선발되였었다. 출발에 앞서 최현은 매 전투원들에게 실탄 150발씩 나누어주고 새 신발도 한컬레씩 공급해주었다. 북동을 떠난 중대가 강행군으로 마촌까지 왔을 때는 이미 우리가 동녕현성전투를 치르고 소왕청에 가있던 9월중순이였다.

우리가 훈춘동무들과 함께 라자구에 들어갔을 때 구국군장병들은 시내인민들과 함께 우리를 열광적으로 맞이하여주었다. 환영군중들가운데는 주변부락들에서 온 농민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들의 열정적인 환영모습을 통하여 이고장 반일조직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

우리의 대오를 향해 손을 흔들고 환호를 올리는 군중의 뒤에는 최정화와 같은 유능한 혁명가들이 서있었다. 그는 라자구반일회장이였지만 만주국의 심부름도 하면서 내막적으로는 반일병사위원회 성원의 자격으로 구국군과의 사업도 많이 해온 사람으로서 라자구에서 우리가 내놓은 반일공동전선로선의 정당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최정화는 인민들을 발동시켜 구국군부대들에 식량과 천도 많이 대주었다.

우리는 중국인거리에서 대렬을 정리하고 항일구국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다음 련이어 춤마당, 노래마당을 펼치였다. 거리량옆의 중국인 가게들에서도 영업을 중지하고 연도에 뛰쳐나와 오락회를 구경하였다.

반일인민유격대와 구국군이 친형제와 같이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라자구시가는 마치 축전도시인양 흥성거리였다. 조선인거리, 중국인거리 할것없이 온 도시가 명절분위기에 휩싸이였다. 젊은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김대장을 보자고 야단들이였다. 김대장이 평안도 사람이라느니, 함경도 사람이라느니, 지어는 경상도태생이라고까지 하면서 저마다 자기 말이 옳다고 옥신각신하였다.

아이들은 38식보총과 탄띠들을 만져보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한 대원이 탄띠를 세개씩 띠였는데 하나는 허리에 혁띠처럼 두르고 나머지 두개는 량어깨에 각각 하나씩 가위다리모양으로 띠였다. 한 탄띠의 정량이 100발이니 각자가 300발씩의 총탄을 휴대한셈이였다.

《나라를 찾느라고 고생하시는분네들, 점심이나 같이 나눕시다.》

녀인들이 대렬에 새하얗게 달려들어 유격대원들의 팔을 승벽내기로 잡아끌었다. 라자구시내에서 10리, 20리 떨어진 고장들에서도 아낙네들이 점심을 지어가지고 유격대를 찾아와 음식을 권하였다.

라자구에 도착한 그날 나는 반일부대련합판사처 동무들의 안내를 받아 오의성사령의 숙소를 찾았다.

우리는 구면으로서 화기애애한 담화를 하였다. 6월의 첫 담판때와 같이 서로 상대를 떠보는 담화가 아니라 인간대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허심탄회한 담화였다.

내가 라자구로 갈 때 제일 우려했던것은 오사령이 그동안 동녕현성전투를 포기하지나 않았는가 하는것이였다. 리청천과 같이 우리와의 합작을 달가와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의성이 동녕현성전투를 단념하고 우리와 구국군과의 관계를 협상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세우도록 설유하지 않았겠는가?…

반일부대련합판사처 일군들은 리청천이 항일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합작이 류산되도록 채세영을 부단히 꼬드기고있는데 그의 리간질이 오사령한테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겠는지 모르겠다고 몇차례 통보해왔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걱정이였다. 오의성의 통일전선의지는 여전하였고 동녕현성전투를 잘하여 구국군이 왕년에 당한 패배를 만회하려는 그의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오사령이 제일 수치스럽게 생각한것은 1932년말에 일본군이 라자구를 《토벌》할 때 받은 타격이였다. 일본군은 그 당시 10여대의 비행기와 수백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구국군을 사정없이 짓뭉개놓았다. 라자구는 재더미로 변하였고 구국군은 성남촌, 신툰자,석두하자와 같은 고장으로 쫓겨났었다.

《수더구를 보면야 사실 우리가 일본놈들보다 더 많았지. 그런데도 우리는 라자구를 내주고 산골로 꽁무니를 뺐거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잠이 안오우. 라자구를 타고앉은 왜놈들이 생사람의 머리를 베서는 남문에 달아매군했지만 우린 복수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산골에만 배겨있지 않았겠나.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만 했으니까.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노릇이지. 이제 동녕에 가면 톡톡히 값을 받아내야지.》

우리에게 이 말을 할 때 오사령은 옆구리의 목갑싸창에 자주 손을 가져갔다. 오의성이 복수심으로 가슴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통일전선의 전도를 위해서 매우 좋은 징조였다.

그날 나는 반성위와 마주앉았을 때처럼 오의성에게 나의 지난날을 추려서 이야기해주었다. 오사령도 그 답례로 자기의 경력을 소개하였다. 그의 고향이 산동성 동창 어디라는것과 그에게 오기성이라는 별명이 있다는것도 그때의 격식없는 한담을 통해 알게 되였다. 우리가 담화를 하고 있을때 오사령의 숙소지붕꼭대기에서는 2명의 유격대원이 보초를 섰다. 구국군측에서도 그날은 지휘부주변의 경계를 물샐틈없이 하였다.

소문과 같이 오의성은 그날 정말로 범가죽우에 비스듬히 누워서 담화를 하였다. 몸이 비대해서인지 걸상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 틀을 차리고 담소하는것은 싫어하였다. 그러다나니 나도 자연히 목침우에 한팔을 고이고 비스듬히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의성은 귀한분이 오셨는데 점심준비를 잘하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나는 식사준비를 해가지고 왔으니 따로 점심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의 식사를 준비해가지고 다닌 사람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는 중국인대원이였다. 오사령은 내가 중국말을 자유롭게 하는데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있었다. 아버지의 덕으로 터득한 나의 중국말밑천은 오의성과의 사업에서도 큰 은을 내였다.

왕청중대와 훈춘중대들은 라자구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군중정치사업방향을 토의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였다.

…구국군이 장차 어떤 길로 나가는가 하는것은 이번 전투에 달려있다. 유격대가 선봉에서 잘 싸우면 구국군이 우리를 따라오는것이고 제구실을 똑똑히 하지 못하면 구국군이 우리를 저버리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동무들은 일상생활과 전투행동에서 항상 모범이 되여야 한다. 이번 전투는 총 몇자루나 쌀 몇포대를 위한 전투가 아니라 통일전선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는 이 전투에 통일전선의 명줄을 걸고있다. 전리품은 구국군이 다 가지라고 하자. 그들이 약담배를 가지든 무엇을 가지든 우리는 상관하지 말자. 그러나 정치도덕적측면에서의 양보란 있을수 없다는것을 모두다 명심하자.…

반일부대의 지휘관들중에서 동녕현성전투방침을 제일 적극 지지해나선 사람은 사충항려단장이였다. 항일유격대가 라자구에 체류하는동안 나와 사려장사이에는 국적과 소속을 초월한 진실한 우애가 싹텄다. 유격대와 구국군의 대부대들이 라자구를 떠나 동녕현성으로 행군해갈 때에도 그는 줄창 우리하고만 같이 다니려고 하였다. 숙영지도 우리의 곁에 정하려고하였고 전투시에도 우리 부대와 함께 행동하고싶어하였다. 라자구에서 동녕현성까지 수백리를 걸어가는 그 나날들에 나와 사려장은 서로 리해를 더욱 깊이 하였다.

9월초에 라자구를 떠난 원정부대들은 며칠간의 시간을 로상에서 보냈다. 행군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니고있는 고결한 혁명정신과 참다운 인간적풍모를 증시하는 계기로 되였다.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의 정치도덕적차이는 실생활과 행군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는 어디 가서나 인민의 군대답게 행동하였다. 상공당이 있어도 마스지 않고 거기에 맛있는 음식들이 놓여있어도 손을 대거나 곁눈을 팔지 않았다. 중국인부락에 들리면 오락회도 하고 선전화도 붙이고 구두선전공작도 하였다. 다른 부대들이 들면 페를 많이 끼쳤지만 우리는 도리여 주민들을 도와 물도 길어주고 망도 갈아주고 마당질도 해주고 울바자도 엮어주었다. 조선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는 전책도 읽어주었다.

이렇게 되자 주민들은 백성들을 알아보는 좋은 군대가 왔다고 하면서 떡도 치고 돼지도 잡아주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다른 부대들은 다 성품이 곱지 못하고 행실이 거칠어서 글렀는데 김사령네 부대는 점잖고 싹싹하고 인정미가 넘쳐서 살이라도 떼주고싶다는것이였다.

우리가 인민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또 인민이 우리를 성심성의로 지지하고 환대하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사충항려단장은 엄지손가락을 흔들어보이며 김대장네 군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신사멋쟁이군대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도 김대장이 령솔하는 공산당군대의 모범을 따르라고 여러번 훈계하였다.

《지금 어떤 작자들이 행군선봉에서 구국군의 망신을 다 시키고있는데 너희들은 그것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행실이 깨끗해야 하늘도 너희들을 굽어본다. 우리 부대에서 녀자들을 희롱하거나 남의 재물에 손을 대거나 백성들에게 호령질을 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나타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는걸 미리 경고하는바이다.》

사충항의 이 말은 그의 부하들에게 효능높은 각성제가 되였다.

어떤 구국군대원들은 어두운 밤에 곡식낟가리만 보아도 일본놈군대라고 하면서 삼십륙계를 놓았다.

이런 일이 몇차례 되풀이되자 우리는 유격대대렬을 맨 앞장에 세우고 구국군부대를 후위로 돌려놓았다. 이 별치 않은 조치는 유격대원들을 분발시키였다. 그들은 동녕현성전투의 승패가 곡식낟가리와 일본군을 혼동하는 구국군에 있지 않고 자기들에게 있다는것, 따라서 통일전선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결정적힘도 자기자신들에게 있다는것을 통감하고 수걱수걱 행군을 다그치였다.

유격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학습을 하였다. 때로는 심각한 정치문제를 내걸고 론쟁도 하였다.

《강동무,  우리가  동녕현성을  왜  치는지  그 목적을 한번 좀 멋있게 말해주게나. 라자구에서 대장동지가 말씀해주실 때는 다 알것 같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그게 알쑹달쑹하거든.》

원정군이 로흑산에 거의 다달았을 때 왕청중대의 뒤꼬리에서 한 대원이 능청스럽게 꺼낸 말이였다. 사실은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고 상대방의 인식정도를 저울질해보자는것이였다.

질문을 받은 강동무도 능청스러운 사람이였다.

《허허,이것봐라. 이 동무가 남의 불에 게를 구울 작정이구만. 임자 기억이 그렇게두 알쑹달쑹하다면 내가 말해주지. 이왕이면 〈십진가〉곡조에 맞추어 노래로 냅다 불러주지.》

그 대원은 상대가 말할 짬도 주지 않고 정말로 《십진가》를 뽑기 시작했다.

 

     하나이라면

     하늘이 무너져도 실현해야 할

     실현해야 할

     통일전선 성공함이 첫째이로다

     첫째이로다

     둘이라면

     둘도 없는 혁명성새 우리 유격구

     우리 유격구

     쏘만국경 멀리까지 확대함이다

     확대함이다

     서이라면

     서리바람 칼칼해도 살기 좋은곳

     살기 좋은곳

     쏘련으로 다닐 통로 개척하는것

     개척하는것

     …

 

질문을 제기했던 박동무는 입을 딱 벌리고 감탄하는 시늉을 하였다.

《동무 재간은 참 금 열닷말을 주구두 못바꿀 재간이야. 나같은 석두한테두 동녕현성을 치는 목적이 청청하늘의 보름달처럼 제법 석연해지는걸.》

왕청중대의 재간둥이인 강동무는 그런 칭찬을 받을만도 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착잡한 경위도 《십진가》에 고스란히 퍼담을줄 알았고 9.18사변의 발발로부터 만주국의 성립에 이르는 소름끼치는 정치적재난과정도 《십진가》의 선률속에 재치있게 함축시킬줄 알았다.

동녕현성전투의 목적을 알기 쉽게 시화한 강동무의 《십진가》는 왕청중대에서 훈춘중대에로, 훈춘중대에서 사충항려단에로, 사충항려단에서 채세영부대에로 순식간에 전파되였다. 몇몇 구국군대원들은 행군을 하면서도 그《십진가》를 흥얼거리였다. 구국군은 우리 부대의 모범을 따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모든 구국군장병들이 다 그렇게 한것은 아니였다. 그들중에는 미구에 차례지게 될 전리품의 몫을 그려보면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활동지역을 쏘만국경까지 넓혀보겠다든가, 유격대와의 통일전선을 잘하여 만주땅을 다시 찾아야겠다는 숭고한 항일리념을 가지고 그것을 화제에 올리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수 없었다.

《여보게, 동녕을 치면 약담배가 많이 생길가?》

우리 부대의 후위에서 사충항의 부하들중 한사람이 자기의 동료를 보고 하는 말이였다.

《글쎄, 위만군이 1개 련대나 배겨있다니까 약담배 같은거야 흔하겠지. 아편없이야 무슨 위만군이겠나. 그런데 아편을 빨지도 않는 사람이 약담배소리는 왜 갑작스레 꺼내나?》

질문을 받은 동료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짝패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다.

《사람두 원, 아편이자 돈이구 돈이자 아편이 아닌가. 허리에 만냥만차면 황새타고 양주로 날아간다고 했네.》

《하긴 그래, 항주구경두 돈없이는 못간다구 했으니까. 자넨 만냥짜리아편을 차고 항주도 가구 서주도 가게. 난 그저 일본제손전지를 하나 얻었으면 하는 소원뿐이야.》

《그까짓 손전지걱정 같은건 하지두 말게. 일본군이 득시글득시글한데 손전지 하나쯤이야.…》

《희떠운소리 작작하라구. 아편두 손전지두 다 승전후에야 생기는 선물이야. 동녕현성이 그렇게 호락호락 떨어질줄 아나?》

우연히 얻어듣게 된 이 대화는 내 마음속에 무거운 연추를 달아놓는듯 하였다.

전리품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저 구국군병사들이 과연 《무적황군의 용사》들과 백병전을 벌릴수 있을가? 중화민국 만세를 부르며 몸이 그대로 육탄이 되여 포대앞으로 돌진할수 있을가?

그들의 언행이나 음침한 눈빛에는 어딘가 미덥지 못한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불길한 징조였다.

우리는 로흑산에서 왕청유격대와 훈춘유격대의 련환모임을 조직하고 다시한번 동녕현성전투의 목적과 군사정치적의의를 인식시키기 위한 정치사업을 벌리였다.

그후에는 동녕현성부근의 고안촌, 오사구 일대에 진출하여 적정을 재확인하고 전투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날밤 우리는 동녕부근에서 지하당조직도 찾아내였다. 그것은 일찌기 반성위가 수녕중심현위 서기로 활동할 때 동녕, 고안촌,신립촌,로흑산 등지에 꾸리고 지도해온 조직이였다. 이 조직이 1932년 봄에 적들한테 로출되여 추적을 당하다가 그중 일부가 왕청지경으로 넘어오고 일부는 동녕에 남아 지하로 깊이 들어갔다. 반성위는 그때 당원들, 공청원들뿐아니라 유격대원들과 일반군중들도 왕청으로 많이 넘겨보냈다.

반성위는 훈춘으로 떠날 때 언제든지 동녕땅에 갈 기회가 생기면 지하에 들어간 당원들과 공청원들을 찾아내여 조직선을 이어주고 자기를 대신하여 잘 보살펴달라고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그 부탁을 잊지 않고 라자구에서 군중정치사업요강을 발표할 때 주민정치사업을 잘하여 동녕현의 지하당조직을 복구할것이라는 조항을 박아넣었다.

우리는 고안촌부근에서 찾아낸 몇명의 당원들로 동녕현지하당을 복구하고 그에 대한 지도를 라자구지하당에서 하도록 조직선도 이어주었다. 이 지하당조직이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우리는 그들의 도움으로 쏘련으로의 통로도 어렵지 않게 개척하였다.

동녕현지하당은 우리가 준 비밀공작지시를 잘 집행하며 1940년대까지 건재하였다.

소할바령회의이후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이 백두산밀영과 쏘련 하바롭스크주변의 훈련기지들을 거점으로 삼고 소부대활동을 벌릴 때 우리는 동녕의 이 통로를 많이 리용하였다. 많은 소부대들이 이 통로를 거쳐 국내와 간도로 나오기도 하고 백두산에서 쏘만국경지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국내에 파견되였던 개별적공작원들도 연해주로 들어갈 때에는 이 통로를 많이 리용하였다.

쏘만국경일대에서 정찰활동을 맹렬히 벌리던 전문욱소조 역시 동녕지하당조직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 당시 쏘만국경을 사이에 두고 동녕현 맞은켠에서 군사복무를 하였다는 국제주의전사 야.떼.노비첸꼬도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들이 이 통로를 타고 왔다갔다하는것을 자주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동녕의 지하조직들은 대일작전시기에도 적의 후방교란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동녕현성해방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우리는 고안촌부근 주민들과 지하조직원들과의 담화를 통하여 동녕현성에 있는 위만군련대장이 비록 만주국에 복무하나 반일감정이 강한 사람이며 위만군과 일본수비대의 관계가 표면상으로는 평온한것 같지만 내면적으로는 알륵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이 련대장은 현성안에 있는 중국인상점 주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의 말을 잘 듣는다고 하였다. 지하당성원들은 상점주인들을 잘 알고있었다.

우리는 지하당성원들이 중국인상점 주인들에게 영향을 주어 위만군 련대장으로 하여금 우리와의 합작에 동의해나서도록 하였다.

동녕현성전투는 1933년 9월 6일밤에 시작되여 9월 7일낮에 끝났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하면서 한 전투를 이틀씩이나 끈 실례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한다.

동녕현성을 치는데서 우리가 력점을 찍은 주공방향은 서문밖의 릉선에 2층으로 축성되여있는 서산포대였다. 이 포대에는 여러정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들이 배치되여있었다. 포대와 일제침략군부대 본부사이에는 깊은 교통호와 지하비밀통로가 굴설되여있어 필요하다면 예비대가 계속적으로 투입되여 공격을 견제할수 있게 되여있었다. 구국군이 언제인가 동녕현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것도 이 서산포대때문이였다.

나는 방차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될 훈춘중대를 짜작골이라는곳에 배치하고 왕청중대를 주공방향에 진출시켜 서산포대를 점령하게 하였다.

밤 9시 적진에 은밀히 접근한 유격대의 파괴조는 성시공격을 알리는 나의 총성신호와 함께 적포대를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적은 교통호와 지하비밀통로를 통하여 력량을 끊임없이 증강하였다. 적아간에는 몇시간동안 치렬한 화력전이 벌어졌다.

나는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을 봉쇄하게 하는 한편 일부 력량을 포대 북쪽으로 우회시켜 적의 화력을 분산시킨 다음 파괴조를 발동시켜 맹렬한 작탄공격으로 서산포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동틀무렵이 다되여서야 포대는 저항을 중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주력부대는 일본군수비대병영을 강철그물 같은 봉쇄망으로 둘러싸고 적의 필사적인 반돌격시도를 가차없이 좌절시키였다. 일본군은 북문으로 도망쳤다.

편의대로 가장하고 시내에 미리부터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을 거쳐 성시에 돌입한 구국군부대들도 자기 위치를 차지하고 전투를 하였다.

위만군부대 본영에서는 대표를 보내여 협동하여 일제침략군을 치자는 우리의 제의에 동의를 표시하였다. 이 합작이 실현되면 성시가 완전히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채세영휘하의 일부 부대들이 위만군이 장악하고있는 상점을 마구 털고 주민가옥들에 달려드는 바람에 위만군은 오히려 약속을 취소하고 질풍같은 기세로 우리들을 공격하여나섰다. 일본군수비대도 이에 합세하였다.

적의 맹공격에 겁을 집어먹은 구국군의 일부 부대들이 점령구역을 내던지고 현성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부대는 결사적인 시가전으로 점령구역을 확대하면서 적들을 현성일각으로 압축하였다. 구국군도 이에 고무되여 병기공장을 점령하고 군수품적치장들을 습격하였다. 시가전은 여러 시간동안이나 계속되였다.

련합작전의 목적이 기본적으로 달성되였다고 인정한 나는 아군에 철수명령을 내리였다. 유격대는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여 현성밖으로 빠져나오는 구국군부대들을 화력으로 엄호하였다.

우리가 사충항려단장이 중상을 당한채 성시안에 쓰러져있다는 보고를 받은것은 이때였다. 그의 부하들은 모두 사지판에 려단장을 남겨둔채 성시밖으로 도망쳐버리였다. 부관도 그를 돌보지 않고 살구멍을 찾아 성문을 빠져나갔다.

내 눈앞에는 어째서인지 전리품타령을 하던 구국군대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약담배와 일본제전지를 꿈꾸고있을 때 나는 략탈과 그것이 전반적인 전투행정에 미치게 될 후과만을 우려했을뿐이였다.

그런 략탈은 이미 전투도중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내던지고 가는 놀라운 행실이 발로되였다. 무릇 군대는 상관을 자기 아버지에도 비기고 어머니에게 비기기도 한다. 그러니 구국군은 부모를 사경에 내던지고 도주한셈이다. 나는 그때까지 전쟁일화를 많이 들어왔지만 이렇게 불효막급한 행실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구국군의 략탈행위와 자기 상관을 내던지고 간 불충불효의 행위사이에는 공통점이 존재하였다. 물질에 대한 탐욕이 결국은 생명에 대한 극단적인 리기심과 비겁성으로 전환된것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들에 나가서도 샌다는 우리 조상들의 명언은 얼마나 심오한 생활의 진리를 담고있는가.

전투는 일상생활의 연장이며 총화라고 할수 있다. 군인들의 전투성과는 싸움마당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평상시의 생활에서 사전에 결정되는 법이다. 전투는 그 일상생활의 반영이고 단적인 표현일따름이다.

력사는 도덕적으로 락후한 군대가 승리자의 단상에 오른 전례를 알지 못한다. 히틀러독일의 나치스군대가 패전의 시궁창에 구겨박힌것도 주요하게는 인륜을 저버리고 무한궤도로 선과 미를 짓뭉개버린 도덕적인 패배자들이라는데 있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일본군의 운명이 서산락일로 된 주되는 리유 역시 그 군대의 도덕적부패성에 있었다. 일본은 일본군대를 세계에서 가장 야수적이고 파렴치한 군대라고 규탄하며 증오하는 수십억의 선량한 인민들과 국제적련합군의 포위속에서 질식하지 않을수 없었다.

일본군처럼 전쟁마당에 《위안부》까지 끌고다니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들을 도살한 군대는 세계전쟁사에서 더는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전쟁은 힘의 대결일뿐아니라 도덕과 륜리의 대결이기도 하다. 전쟁행정에서 도덕이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거나 도덕자체를 불필요한 치장품으로 여긴다면 그런 군대는 하나의 거대한 오물더미와 같은것이다.

나는 최춘국에게 사충항을 구출할것을 명령하였다.

최춘국은 그 명령을 결사적으로 집행하였다.

우리는 유격대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구원해낸 사충항을 등에 업고 그를 화력으로 엄호하면서 부대를 고지쪽으로 무사히 빼돌리였다. 유격대원들은 자기 상관을 내버리고 간 사충항의 부하들을 벼락맞을 놈들이라고 욕하였다.

구국군대원들의 소행을 생각하면 사실 욕지거리가 나갈만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소행으로 하여 유격대와 구국군사이에 금이 가는것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동녕현성전투의 의의는 비단 적군을 수백명 소멸했다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중요한것은 구국군이 이 전투까지 겪고나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신임하게 되였다는것이다. 반일인민유격대는 동만땅에서 이전날처럼 또다시 붉은기를 들고다니며 보무당당히 합법적으로 활동할수 있게 되였다. 동녕현성전투는 구국군의 의식속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참모습을 심어주었다.

그후부터는 중국의 반일부대들이 우리를 해치는놈들만 있으면 자청하여 따라다니면서 답새겼다.

《1933년 9월 7일은 내가 두번째로 생명을 받아안은 날이다. 지금까지의 생명이 부모들이 준것이라면 9월 7일부터의 생명은 김일성사령이 준것이다. 김일성사령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고 항일유격대는 우리 구국군의 첫째가는 형제들이다.》

이것은 사충항이 의식을 회복했을 때 우리에게 한 말이다. 그의 입을 통하여 항일유격대가 얼마나 희생정신이 높은 군대이며 얼마나 동지적의리에 충실한 군대인가 하는 전설같은 소문이 만주각지로 날아갔다.

동녕현성에서부터 라자구까지 연연 수백리를 헤아리는 귀환의 길에서도 나는 노상 사려장의 곁에 있었다. 첫날은 우리가 줄곧 담가를 들고갔다.

구국군대원들은 자기네 상관이 유격대원들의 담가에 실려가는것을 보면서도 감히 그곁에 접근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부관이 대원들과 함께 자기네 사령을 넘겨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유격대원들은 그들을 쫓아버리였다.

부관이 세번째로 우리 대렬로 찾아오자 나는 구국군에 사충항이 누워있는 담가를 인계해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들도 지각을 가진 인간들인데 이제는 자기네 과실을 뉘우치지 않았겠는가, 저 사람들에게 담가를 들고갈수 있는 권리만이라도 넘겨준다면 그들이 전장에서 저지른 죄를 다문 얼마만이라도 씻게 될수 있을것이라고 대원들을 설복하였다.

우리가 사충항을 넘겨주자 구국군대원들은 황송하여 절까지 하였다.

사려장은 부하들이 자기를 버리고 간데 대하여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들이 그런 행실을 보여준데 대해서는 상관의 립장으로 오히려 우리한테 사죄하였다.

《김사령, 저 미물 같은 인간들때문에 내 대장을 볼 면목이 없구려. 내가 부하들을 잘 키우지 못한탓이니 허물을 따지려면 나한테 따지고 우리 부하들을 용서해주시오.》

나는 그가 부하들의 수치를 자기의 수치로 받아들이는것을 보고 크게 감동되였다. 사충항이 부하들에게 분풀이를 하였거나 그들을 조금이라도 원망하였더라면 나는 그토록 감심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는 무관치고도 참으로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큰 무관이였다.

《중국속담에는 단 참외에도 쓴 꼭지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천날 다 좋을수 없고 꽃도 천날 다 고울수 없지 않습니까. 사려장이 치명상을 입고도 원기를 회복하였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말을 사려면 이발을 보고 사람을 사귀려면 그의 마음을 보라는 말도 있지만 내 김사령과 같은분을 벗으로 사귀게 된걸 하늘이 나에게 준 운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평생토록 귀중하게 간직하겠소.》

사충항은 나보다 나이가 열둬서너살 더 먹은 년장자였지만 반일공동전선을 실현해가는 길에서 나와 피로 맺어진 전우가 되고 동지가 되였다. 동녕현성전투가 있은후 그는 부대의 주둔지도 마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북구에 정하였다. 우리는 친척집 문턱을 넘나들듯이 서로 자주 왕래하면서 친교를 두터이 하였다.

사려장의 총상자리를 완치시키려고 나는 그에게 약도 많이 가져다주었으며 그의 사상을 개변시키기 위하여 공산주의적인 영향도 많이 주었다. 그런 과정에 그는 공산당에도 입당하였고 인민혁명군의 지휘관으로도 성장하였다.

사충항은 1934년 6월의 라자구전투에서도 반일련합작전을 위하여 잘 싸웠고 인민혁명군에 편입된후에는 독립 2사 사장으로 적지 않은 무공을 세웠다. 그는 전투때마다 맨 앞장에서 싸창을 빼들고 적진으로 돌진하군하였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은 세상에 사려장 같이 훌륭한 지휘관은 없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였다. 다른 구국군부대병사들도 사려장을 무척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그런 병사들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부대를 탈출하여 사충항의 부대에 넘어왔다.

사충항은 로송령전투때에도 최선두에서 나가다가 복부에 치명상을 입었다. 총탄이 배를 관통하지 못하고 속에 박혀있었는데 그것을 뽑아내려고 쏘련으로 넘어갔다가 거기서 인차 운명하였다. 사려장의 추도식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얼마나 애달프게 그를 추억하였는지 모른다.

동녕현성전투의 포화속에서 우리와 함께 항일로 튼튼히 결합된 채세영도 후에는 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여 5군 부군장을 거쳐 군장을 하였다. 그는 북만을 활동거점으로 삼고 주보중의 수하에서 우리와의 형제적뉴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40년대 전반기에도 나와 채세영사이에는 밀접한 련계가 있었다.

동녕현성전투를 통하여 항일유격대와 반일부대사이의 공동전선이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것으로 굳어졌을 때 우리앞에는 이 공동전선을 박살낼수 있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건이 발생하였다.

화근으로 된것은 장개석을 미화한 오의성의 발언이였다. 우리는 그때 라자구에 돌아와 련합모임을 열고 공동으로 동녕현성전투를 총화하였다. 오사령은 그 모임에서 첫 발언을 하였는데 뜻밖에도 련합부대가 동녕현성전투에서 승리한데 대하여 말하면서 별스레 장개석을 칭찬하고 장개석이 남방에서 대포도 보내주고 군대도 보내주어야 동북의 항일전쟁이 앞으로도 승승장구할수 있다는 말을 하여 유격대원들의 분노를 격발시키였다.

훈춘유격대를 책임지고 온 백일평은 그 말을 듣고 연단에 뛰여올라가 장개석이 제국주의의 개라는것은 온 세상이 다 알고있는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우리를 원조하며 령도할수 있는가, 장개석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오사령은 반동이라고 규탄하였다.

오의성은 노발대발하여 백일평을 체포하고 그를 총살하겠다고 을러댔다.

이렇게 되자 백일평의 대원들이 막 들고일어났다. 우리는 동녕현성싸움을 하면서도 대원 하나 잃지 않았는데 통일전선을 하다가 상관을 잃는다니 말이 되는가, 우리가 자기 지휘관을 잃고 무슨 체면으로 훈춘으로 돌아가겠는가, 우리가 다 죽더라도 마지막한사람까지 오의성과 싸워 백일평동지를 구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총을 들고 당장 달려나가려고 하였다.

구국군들도 총을 들고 맞불질할 차비를 하였다.

총성 한방에 무리죽음이 날수도 있고 또 모처럼 이루어진 통일전선이 깨여질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앞에서 오의성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채로 입술을 푸들푸들 떨기만하였다.

나는 연단앞에 나가서 조선말과 중국말로 쌍방을 다같이 설복한 다음 오사령을 타일렀다.

《오사령, 노엽겠지만 너그럽게 생각하고 백일평을 놓아주시오. 그 사람이 사령의 체면을 보지 않고 반동이라고 한것은 외람된 일이지만 오사령도 좀 생각해볼 문제가 있습니다. 온 중국이 다 제국주의의 개라고 락인하고있는 장개석을 그렇게 추어주니 사람들이 그걸 달갑게 받아들일가요. 구동북군이 항일을 못하도록 9.18사변전부터 장학량에게 미리 못을 박아놓은 사람도 바로 장개석이 아닙니까. 이제 백일평을 총살하면 온 만주가 오사령을 역적이라고 손가락질할터인데 심사숙고했으면 합니다.》

내가 말을 끝내자 구국군들속에서는 《저 사람이 누군가? 남방에서 온 사람인가? 국민당이 보낸 파견원인가?》하고 떠들었다. 그러자 《남방은 무슨 남방, 김일성이야,김일성이라는 유격대 대장이야.》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 무식해서 한 소리이니 나를 장개석과 한통속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주시오.》

오의성은 이런 말까지 하고나서 총살령을 철회하겠다고 언명하였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백일평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자 구국군 하층병사들이 자기네 사령을 미욱한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오사령은 왜 김사령과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우리가 안죽인다면 다다. 오사령이 죽이겠다면 마음대로 다 죽이는가.》

《백일평을 죽이면 우리 구국군이 벼락을 맞는다.》

병사들이 이렇게 뒤에서 웅성거리고있을 때 장교들은 오의성에게 백일평의 석방을 촉구하는 편지와 진정서들을 보냈다. 백일평은 사흘만에야 오사령의 손에서 풀려나왔다.

반일부대와의 공동전선을 실현하는 과정은 이처럼 수많은 로고와 인내와 희생을 동반하였다. 혈형이 서로 다른 두 《생명체》의 결합이 어찌 아무런 곡절도 고충도 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질수 있겠는가.

적들은 동녕현성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시체를 련 사흘동안이나 화장하였다. 그대신 우리는 호진민을 잃었다. 그는 라자구로 돌아오는 길에서 오발로 객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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