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혁명전우 장울화 (1)

 

앞에서도 이야기하였지만 김산호가 천을 해결해가지고 마안산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다시금 그를 무송현성에 파견하였다. 20원어치의 천을 가지고서는 아동단원들에게 옷을 다 해입힐수 없었다. 싸움을 하여야 천도 로획할수 있겠는데 나는 나와 오래전부터 인연을 맺고있는 이 성시에서 백병전을 벌릴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새 사단의 조직으로 혁명군의 면모를 일신시킨 우리는 그 성과에 기초하여 인민혁명군의 군사정치적력량을 확대해가는 단계에 있었다.

힘도 축적하기전에 총소리부터 먼저 내면 무송에서의 우리의 처지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질수도 있었고 백두산지구진출도 많은 난관에 봉착할수 있었다.

천을 얻을수 있는 유일한 출로는 장울화의 도움을 받는것이였다. 대부호의 아들이며 나의 혁명전우이며 항일구국의 리념에 충실한 열성조직원인 장울화만이 내가 당하고있는 고충을 자기의것으로 받아들일수 있었고 전력을 다하여 나를 어려운 처지에서 구원해줄수 있었다.

내가 무송에 다시 갔다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김산호는 좀 얼떨떨해하였다. 방금 다녀왔던곳에 또 가라고 하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나도 속으로는 그를 휴식시키고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하지만 아이들과 새로 편성되는 부대들을 위해서는 다시 한번 그에게 힘든 일거리를 맡기지 않을수가 없었다. 김산호는 장울화와의 사업을 제일 자연스럽게 할수 있는 적임자였다. 장울화가 장아청이라는 아명으로 오가자의 삼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때 김산호는 그곳 반제청년동맹지부에서 청년들과의 사업을 하였다. 사업상의 련계나 친교는 비록 없었지만 이런 정도의 연고면 신임장도 대신할수 있었다.

《산호동무, 미안하오. 어려운 일이 제기될 때마다 매번 동무를 찾게 되는구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동무가 너무 혹독한 상관을 두고있는게 아닐가?》

자기를 구원해준 소부대동무들과 함께 마안산에 돌아와 로독을 풀던 김산호가 새로운 과업을 받으려고 내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이런 말로 그를 맞이하였다.

김산호는 충혈된 눈으로 몇초동안 나를 쳐다보다가 굵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령관동지답지 않게 우회작전을 하시는구만요. 제가 무슨 과업을 수행해야 하는지 직방 말씀해주십시오.》

김산호의 그 말은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었다.

《좋소. 그럼 산호동무는 래일아침 다시 무송으로 떠나야겠소. 나는 동무를 장울화한테 파견하기로 결심하였소. 아무래도 그 사람의 신세를 좀 져야 할것 같소. 오가자에 와서 소학훈장을 하던 그 중국청년이 생각나겠지?》

《장아청선생말입니까. 생각나지 않구요. 안경알너머로 사람들을 수집게 쳐다보던 그 눈매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선생의 기타소리가 구수했지요.》

《그러면 됐소. 내가 소개신을 써줄테니 동무는 그 소개신을 가지고 장아청이를 만나보오. 시내를 한바퀴 돌면서 정찰을 슬슬 하다가 소남문거리쪽에 가서 장만정의 집을 찾으시오. 그 장만정이 바로 장울화의 아버지인데 무송에서 꼽히는 부자요.》

김산호는 희색이 만면해서 가슴을 쭉 펴고 나를 쳐다보았다.

김산호는 들놀이라도 가는 사람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키가 류달리 큰 이 륙척장신의 사나이한테는 주위의 동료들이 존경을 가지고 쳐다보게 하는 실농군의 기질이 있었다. 그는 일거리가 생긴 날은 어깨바람을 일구며 돌아갔지만 아무 일거리도 차례지지 않는 날은 무슨 울화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우울해서 돌아갔다. 그의 얼굴은 과업을 받은 날과 받지 못한 날의 기분상태를 정확히 반영하는 일종의 한난계와도 같았다.

나는 나의 하루일과중에서 노란자위라고 부를수 있는 새벽시간을 깡그리 털어서 장울화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때 누가 발기했던지 콩기름통밑바닥을 2중으로 만들고 그사이에 편지를 넣어가지고 가게 창안을 하였다. 김산호는 그 콩기름통을 들고 흡족한 기분으로 마안산을 떠났다. 군경들의 검문에 합격할수 있는 알짜배기 콩기름장사로 가장시키려고 박영순은 그에게 《쿠리》들의 옷보다 더 허술하고 기름때가 반들반들한 옷까지 구해다 입히였다.

나는 가슴을 조여가며 장울화의 소식을 기다리였다. 김산호를 기다리며 잠을 못이루던 그 며칠밤 나의 일체 상념은 온통 장울화에게로만 달리였다. 김산호의 귀환을 기다리는 그 한초한초는 실로 장울화에 대한 그리움속에서 흘러갔다.

이제라도 꽁무니에 걸레짝 같은 수건이나 하나 차고 김산호와 같은 《쿠리》차림으로 현성에 슬금슬금 내려가 장울화를 만나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장울화와 함께 우리의 옛집이 있는 소남문거리도 거닐어보고 제1우급소학교시절의 스승들과 학우들도 만나보고 양지촌의 아버지묘지에도 찾아갈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일 내앞에 산더미 같은 일감들이 쌓여있지 않고 또 내옆에 친혈육이상으로 나의 신변을 각별히 보호해주는 전우들이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만난을 무릅쓰고 무송행각의 길에 오르는 모험을 하였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처럼 가고싶어하는 그 땅에는 나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학창시절의 많은 시간을 무송에서 보낸 나는 그 지방의 군경들에게도 환영할수 없는 인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무송은 내가 관헌들의 손에 체포되여 구류장의 밥을 먹어보았던 또하나의 음험한 군벌소굴이였다. 그러나 거기에 나의 소년시절의 살점 같은 한 토막이 남아있고 아버지의 산소가 있고 사랑하는 중국의 벗 장울화가 살고있다는것으로 하여 나는 이 분지의 도시를 변함없이 사랑하였다.

무송의 십자거리 한옆에는 1932년 6월 남만원정을 나갈 때 나와 장울화의 상봉을 마련해준 《동소과》라는 양주공장이 있었다. 그 양주공장은 후에 이름을 달리 달았다가 내가 남만원정때 그곳에서 장울화를 만났다는 사적이 알려진 다음부터 다시 본래의 이름대로 《동소과》라고 하였다 한다. 장금천이 나의 생일 80돐에 그 양주공장에서 만든 《동소과》라는 이름있는 술을 나에게 가지고 와서 전할 때 나는 무송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다시금 느꼈다. 거기서 나는 장울화와 함께 여러차례의 담화를 하였다.

우리는 혁명을 두고, 미래를 두고 많은 소감을 나누었다. 장울화는 그때 자기의 안해가 임신하였다는 말까지 하였다. 그 아이가 바로 지금 무송에 살고있는 그의 아들 장금천이다.

장울화는 그때 부대의 위용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성주의 부하들이 참 끌끌하구나. 기차칸에서 우리가 만난게 한해도 못되는데 이렇게까지 빨리 군대를 조직하다니. 성주가 그동안 큰일을 했어. 이제는 대사를 이루게 됐지, 대단해!》

그는 엄지손가락을 곤두세우고 연방 나를 칭찬하였다.

나는 그의 가식없는 격찬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였다.

《울화, 너무 비행기를 태우지 말라구. 우린 방금 첫시작을 뗐을뿐이야. 사람으로 치면 갓난애기라고나 할가. 그런데 이 갓난애가 세상에 태여나는데서는 울화가 준 수십자루의 총이 큰 은을 냈어. 울화는 우리 군대를 출산시키는데서 무시할수 없는 공을 세운 조산원의 한사람이야.》

《그건 지나친 칭찬인걸. 나는 지금 자기자신을 얼마나 쓸모없고 무기력한 존재라고 타매하고있는지 몰라. 성주는 지금도 이전날처럼 변함없이 나를 믿고있겠지?》

《그럼 믿지 않구. 믿어도 단단히 믿지. 저기 저 송화강의 물줄기가 설사 거꾸로 흐른다고 하여도 울화에 대한 나의 정이야 변할수가 없지.》

장울화는 불현듯 내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성주, 나를 성주의 부대에 받아달라구. 나도 무장을 들고 떳떳하게 항일을 하고싶단 말이야. 성주가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는 무송에서 성주를 놓아주지 않겠어.》

이 단도직입적인 요청앞에서 나는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울화, 정말인가?》

《정말이구말구. 성주의 부대가 무송에 온 첫날부터 나는 매일 그 생각만 했어. 처도 지지하였구…》

《그럼 아버지는? 아버지가 놓아줄가?》

《아버지야 놓아주건 말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간다면 가는것이지. 성주도 기차칸에서 말하지 않았나. 나라가 없어지는데 집이 다 무엇이냐, 부모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혁명을 해야 한다구 말이야. 진한장도 부호의 자식으로서 혁명을 하는데 나도 구국군공작 같은것이야 할수 있지 않는가.》

《울화가 빨찌산대오를 따라가겠다는건 좋은 생각이야. 그렇지만 울화, 혁명이란 무장투쟁이라는 한개의 전선만을 가지고있는게 아니야. 나는 울화가 무송에 그냥 남아서 지하혁명사업을 해주었으면 해.》

《지하혁명사업이라니? 그럼 유격대에 못받아주겠다는건가?》

《못받아주겠다는것이 아니라 다른 전선에서 싸워주었으면 하는거지. 군중을 교양하고 조직결속하는 지하혁명투쟁은 무장투쟁에 못지 않은 중요한 전선이야. 이 전선에서 활동하는 투사들이 인민대중을 잘 묶어세우지 못한다면 무장투쟁은 그 기초를 공고히 해나갈수 없어. 그래서 우리는 무송지구에도 강력한 지하혁명전선을 꾸리려고 생각하였어. 나는 울화가 이 전선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였으면 하는거야.》

장울화는 기력이 빠진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천천히 안경알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럼 성주는 나를 적들의 총탄이 미치지 않는 2선으로 빼돌릴 심산이구나. 부자집자식으로 호강을 해온 사람이니 고생을 견뎌내지 못할거란 말이지?》

《물론 그런 계산이 전혀 없다고는 할수 없지. 울화의 체질을 가지고서는 험산준령을 타고다니는 유격대생활을 감당할수 없어. 나야 뭘 숨기겠나. 나는 울화의 사상을 불신하는것이 아니라 육체적준비를 걱정하는거야. 그러니 산에 들어와 고생을 하느라고 하지 말고 집에 있으면서 사진관도 차려놓고 교원도 하면서 우리의 사업을 힘껏 도와달라는것이지. 대부호의 자식이라는 간판이 얼마나 좋아. 그 간판이면 울화는 혁명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자기 정체를 숨길수가 있거든.》

나는 다음날에도 장울화를 근기있게 설복하였다.

우리의 싱갱이는 결국 장울화가 나의 조언을 받아들이는것으로 끝났다. 우리가 무송을 떠나는 날 그는 나를 바래주며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유격대를 따라가겠다고 결심한것은 지하투쟁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성주와 함께 있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서 그러는거야. 성주가 없는 나의 생활, 그것은 바이올린이 없는 관현악과 같은것이지. 내가 성주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성주는 다 모를거야. 그러니 어데 가서나 나를 잊지 말아달라구. 나한테는 성주보다 더 가깝고 귀중한 친구가 없어. 아무쪼록 몸조심하라구.》

그날 장울화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래주었다.

나는 그날 그를 비밀공청조직에 받아들이였다.

그때로부터 어언 4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4년이라면 적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장울화는 언제나 나의 관심속에 있었으며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은 늘 꽉 차있었다. 나는 초조하게 김산호를 기다리였다.

콩기름통을 지고 무송시내에 내려간 김산호는 콩기름흥정을 하면서 얼마동안 현성안을 돌아다니다가 장울화가 《형제사진관》을 운영한다는것을 알았다. 말이 사진관이였지 내용은 무송지구의 지하조직들을 지도하는 본부나 다름없었다. 장울화는 이 본부에 틀고앉아 돈벌이도 하고 조직원들과의 련계도 가지고있었다. 김산호가 찾아가서 《장선생, 좀 만날수 있을가요?》라고 하자 그는 현상실로 손님을 안내하였다.

《나는 김일성장군이 보내서 당신한테 왔소. 김일성장군은 지금 무송근방에 와있소. 당신이 어떻게 살고있는가를 알아오라고 해서 내가 그분의 위임을 받고 당신을 찾아왔소.》

김산호가 장울화에게 한 말이였다.

장울화는 김산호를 인차 알아보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아, 김성주! 성주가 가까이에 와있단 말이지요. 당신은 김성주가 있는곳으로 나를 안내할수 있소?》

《지금은 멀어서 가기가 힘드오. 우리가 차후 중간지점에 알맞춤한 장소를 정하고 통지할테니 거기서 김장군을 만나는것이 어떻겠소?》

장울화는 산호를 미덥지 않은 눈길로 훑어보다가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아 읽고나서야 얼굴에 밝은 미소를 담았다.

《좋소. 그러면 련락을 기다리겠소. 김성주에게 편지를 고맙게 받았다는 내 인사를 전해주시오. 내가 건강하다는것과 약속에 충실하였다는것도 보고해주시오.》

김산호는 의기양양해서 마안산밀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소식들로 가득찬 그의 보고는 1936년 봄이 나에게 줄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라고 할수 있다. 나는 새봄의 훈향에 취한 사람처럼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발목이 아파나도록 밀영을 거닐었다. 나의 제의에 따라 장울화와의 상봉장소는 무송현 묘령부근에 있는 천연동굴로 결정되였다.

내가 만나게 되는 사람이 수십정보의 땅과 수십정보의 인삼포, 수많은 가병들을 가지고있는 대부호의 아들이라는것을 알게 된 우리 동무들중 일부는 나의 묘령행을 미타하고 안심할수 없는 걸음이라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사령관동지, 이거 주제넘는 간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씨부호의 아들을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심사숙고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사람이 사령관동지의 소학동창이고 또 다년간 조직생활도 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계급적본성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그는 어쨌든 착취계급의 자제가 아닙니까.》

나는 그런 권고를 즉석에서 밀어버리였다.

《동무들, 동무들이 내 신변을 걱정해주는건 고마운 일이요. 하지만 나는 그 권고를 받아들일수 없소. 동무들은 지금 계급적본성이 어떻다면서 자기네 사령관이 무슨 함정에라도 찾아가는것처럼 아부재기를 치는데 그것은 나의 둘도 없는 혁명전우 장울화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우리의 통일전선정책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수밖에 없소.》

《사령관동지! 저희들은 지방조직에 있을 때 사람의 계급적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것과 부자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상으로 교양받았습니다. 우리가 혁명군에 입대한 다음에도 적지 않은 지휘관들은 그렇게 교양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주, 자본가들과 로동자, 농민들사이에는 오직 투쟁이라는 한가지 원리만이 작용하며 착취계급일반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이거나를 막론하고 타도하거나 청산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습니다.》

묘령행차의 반대자들은 한두마디의 훈계에 호락호락 굽어들 사람들이 아니였다. 그런 사람들이 혁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초혁명적인 주장을 한다고 하여 함구령을 내릴수는 없었다. 우리 대내에는 그때까지만 해도 고전의 명제들을 혁명실천과의 련관속에서 창조적으로 보지 않고 통채로 받아들이거나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인간들이 적지 않았다. 맑스나 레닌의 명제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한치의 에누리도 허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법규로 되고있었다. 이런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교조를 떼버리자면 꾸준한 원리교양이 필요하였다.

나는 말했다.

착취계급을 반대하여 투쟁하는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지주, 자본가들이 우리의 적대계급이라는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동무들이 명심해야 할것은 지주, 자본가들이라고 하여 다 한몽둥이로 다스려서는 안된다는것이다. 지주, 자본가들 가운데도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항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오가자내막을 잘 아는 김산호동무도 있지만 조가봉이란 그고장 지주는 우리의 혁명활동을 얼마나 잘 도와주었는지 모른다.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은 조가봉이란 지주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후원해주었다. 우리가 오가자에서 무장투쟁준비를 하고있던 1930년 가을에 장울화는 자기네 가병들이 사용하던 수십자루의 총을 나에게 무가로 넘겨주었다. 지금 우리가 잡고있는 이 한자루한자루의 총이 얼마나 비싼대가로 이루어진것인가를 동무들은 다 잘 알고있을것이다. 우리 대오에는 총 한자루를 위해 청춘을 바친 렬사들도 많았다. 그런데 장울화는 우리가 목숨을 바치면서 힘들게 구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그런 무기를 단꺼번에 40자루나 넘겨주었다.

장울화를 믿지 못할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장씨가정이 지난날 우리를 얼마나 우호적으로 대했고 우리 가정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구태여 더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계급성과 계급투쟁에 대한 일면적인 해석이 우리 혁명에 얼마나 큰 손실을 주는가에 대해서는 반드시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동무들의 견해대로 하면 장만정과 같은 지주는 아무리 혁명에 리로운 일을 많이 하여도 착취계급이기때문에 타도대상으로 되고 반면에 로동자, 농민출신의 밀정은 아무리 혁명에 해로운 일을 많이 하여도 기본계급이라는 리유로 포섭대상으로 된다. 이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규정인가.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을 평가하는데서 항상 공명정대한 립장에 서야 한다. 이것은 소속이나 신앙이나 계층에 관계없이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대로 평가하고 공로는 공로대로 평가해야 한다는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사람들을 평가하는데서 언제나 과학적인 립장에 서야 한다. 과학적인 립장에 선다는것은 그 어떤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사람을 평가할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과 실제행동을 기본으로 하여 객관적립장에 철저히 서서 사람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것이다. 사람을 평가하는데서 출신만을 절대화하게 되면 과학성을 보장할수 없으며 그런 평가는 공정한 평가로 될수 없다.

우리가 만일 계급성이나 계급투쟁 일면만을 부르짖으면서 사람들을 좌경적으로 평가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겠는가? 그런 처사는 의심할바없이 많은 사람들을 적의 진영으로 밀어던지는 후과를 낳게 된다. 적은 바로 우리가 이렇게 눈뜬 소경이 되여 사람들을 함부로 의심하고 닥치는대로 타도할것을 바라고있다.

동무들, 우리는 간도에서 반《민생단》투쟁의 과녁이 되여 마음고생을 많이 해온 사람들이다. 같은 가마밥을 먹으며 생사를 함께 해온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당할 때 동무들은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눈물나는 그런 체험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오늘은 의심받을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의로운 인간들을 향해 함부로 그 저주로운 불신의 무기를 쳐들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로 묘령행차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깨우쳐준 다음 몇명의 호위성원들과 함께 마안산밀영을 떠났다.

일부 사람들이 부자들의 계급적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내걸고 나와 장울화와의 상면을 반대한것은 지나친 우려라고 할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대수롭지 않게 내던진 그 말마디들이 나와 장울화의 우정, 우리 가정과 장울화네 가정사이에 맺어졌던 친교를 모욕한것 같아서 나는 불쾌감을 금할수 없었다. 그것은 10년이상의 력사를 가지고있으면서도 송화강의 흐름처럼 꾸준하고 변함없는 우리의 신성하고도 뿌리깊은 우의에 먹칠을 하는것과 같은것이였다. 우리의 우정은 그 어떤 리유나 궤변으로써도 훼손시킬수 없는 진지하고 심오하고 진실한것이였으며 전반적혁명의 리익과 공산주의적인도주의와 륜리도덕에도 부합되는것이였다.

유산자는 착취자라는 한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부자들을 다 반동으로 본다면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 사회개조의 어려운 길을 애써 걸어갈 필요도 없지 않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재산의 유무나 대소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사람을 평가하는 나의 기준은 그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인민을 얼마나 사랑하며 조국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데 있었다. 부자라고 하더라도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사람으로 보았고 무산자라 하더라도 조국애와 인간애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라면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사람을 평가하였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미 이야기하였지만 나의 소년시절의 첫 동지 강윤범은 가세가 넉넉한 집 자식이였다. 윤범이네 집에서는 자그마한 과수원도 가지고있었다. 생활수준으로 보면 우리 만경대집과는 비교가 안되였다. 그렇지만 나는 강윤범을 무척 사랑하고 신임하였다. 그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열렬히 조국을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소년이였기때문이다.

회고록 1권에서 이야기한 백선행도 큰 부자였지만 평양시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치였다. 사실 그를 대부호로 만든것은 평생 먹기 싫은것을 먹고 입기싫은 옷을 입고 하기 힘든 일을 했다는 그의 초인간적인 근검절약의 정신이였다.

물론 세상에는 수많은 땅과 재물을 가지고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착취하고 고혈을 짜내며 치부하는 수전노들, 인륜의 도를 어기고 무지막지한 행위를 자행하며 온갖 사회악을 빚어내고있는 악덕부자들이 많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와 유산자들이 다 그런것은 아니다.

백선행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콩나물장사도 하고 두부도 팔고 꽃도 팔고 베도 짜고 무명낳이도 하고 돼지도 기르고 뜨물찌끼장사도 하면서 얼굴에 분 한번 바를사이 없이 이악스럽게 부를 쌓아나갔다. 16살에 청상과부가 된 때로부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일하면서 피땀으로 저축한 수천수만원의 거금을 그는 사회를 위한 사업에 고스란히 바치였다.

그가 맨처음으로 사회를 위해 해놓은것이 바로 《솔뫼다리》라고 부르던 송산리의 석조다리이다. 백과부의 덕행에 감동된 평양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선행이라 짓고 그 함자를 따서 《솔뫼다리》를 《백선교》라고 명명한것은 그후의 일이였다.

그 당시 평양의 신시가지에는 부립공회당이 하나 있었다. 그 공회당의 사용권이 일본인들에게만 있고 조선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백선행은 분개한 나머지 조선사람들만을 위한 공회당건설의 총공사부담을 혼자서 걸머지고 수만원에 달하는 돈을 아낌없이 출자하였다. 지금도 련광정앞에는 지난날의 평양공회당이던 3층짜리 석조건물이 옛모습 그대로 서있다.

백선행은 민족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도 막대한 투자를 하였는데 평양의 광성소학교, 창덕학교, 숭의녀학교와 같은 학교들에서는 그가 기증한 수십정보의 토지들을 밑천으로 삼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결국 나도 백과부의 덕이 미친 창덕학교에서 그 덕행의 일부를 받아안은셈이다.

백선행은 자기의 후원을 받고있는 학교들에 나가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군하였다.

너희들은 조선의 장래를 책임지게 될 아들딸들이다. 졸린다고 자지말고 놀고싶다고 놀지 말고 공부하기 싫다고 책을 밀어두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한다. 너희들이 공부를 잘해야 우리 나라가 독립된단다.

총독부에서 주는 표창을 전달하려고 서울에서 고관이 내려와 면회를 청하였으나 백과부는 거절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내가 주장하고 견지해온 사람평가에서의 사상본위, 행동본위의 기준은 후날 우리 나라 공산주의운동과 민족해방투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였다. 만일 우리가 이런 기준을 가지고 민족의 총동원을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조국광복회 산하에 그처럼 많은 군중이 모여들지도 않았을것이며 조국통일이 지상의 과제로 나서고있는 오늘 그처럼 많은 남녘의 민중들과 해외교포들이 민족대단결의 기발밑에서 어깨를 겯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부르짖지도 않을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의 사상이나 본심을 보지 않고 신분에 기초하여 부자일반을 반대하는데로 나아갔더라면 해방후 정준택, 강영창, 로태석, 리지찬, 김응상과 같은 유산자출신의 지식인들은 우리 나라 정치무대에 등장하지도 못하였을것이며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데서 그처럼 놀라운 헌신성과 위훈을 발휘하지도 세우지도 못하였을것이다.

나는 중국의 유산자들도 이와 꼭같은 관점과 립장을 가지고 대하였다. 이런 관점과 립장이 없었더라면 나는 대지주의 아들인 진한장을 나의 벗으로 삼지도 않았을것이며 대부호의 자식인 장울화를 우리 혁명조직에 받아들이고 그와 함께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지도 않았을것이다. 진한장이나 장울화의 생애가 보여주는바와 같이 중국에서 공산주의운동을 개척해온 명망높은 인사들가운데는 유산계급출신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많았다.

자기의 전생애를 중화민족의 행복과 공산주의위업, 프로레타리아국제주의위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주은래도 출신을 따지고보면 청나라말기의 부유한 관리의 아들이였다.

장울화가 출신과는 관계없이 자산계급을 적대계급이라고 보는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공산주의운동에 전생애를 바친것은 나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그에게 애국주의적인 교양을 준것은 아버지 장만정이였지만 공산주의적인 영향을 준것은 나와 나의 동무들이였다. 내가 무송제1우급소학교 5학년에 편입하였을 때만 해도 그는 소박한 소년우국지사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역시 그 당시까지는 평범한 애국소년이였다. 그가 공산주의사상을 신봉하기 시작한것은 내가 《ㅌ.ㄷ》와 공청을 조직하고 그 줄기를 사방에 뻗쳐갈 때였다. 그때 나는 우리 어머니와 박차석을 중심으로 하여 무송에서 당조직을 대신할수 있는 공산주의비밀소조를 무었는데 정학해, 채주선과 함께 장울화도 그 조직에 관계하였다. 이때부터 장울화는 공산주의물을 먹기 시작하였다.

나는 사회장의 소개로 무송제1우급소학교에 편입한 첫날부터 장울화와 함께 공부하였다. 우급이란 고급이란 뜻이다. 불우한 망국소년 김성주와 대부호의 아들 장울화의 동석공부, 어찌보면 력사의 장난 같기도 한 이 파격적인 결합속에서 우리의 류례없는 우정이 싹트고 개화하였다는것은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을것이다. 하지만 함께라는 그 조건부속에 우리 우정의 출발점이 있은것은 아니였다. 나와 장울화의 우정은 나의 아버지 김형직과 장울화의 아버지 장만정의 친교에 그 출발점을 두고있었다.

공영과 박진영의 도움으로 만강의 토비굴을 무사히 탈출한 아버지는 한동안 대영이라는 조선사람이 많이 사는 부락에 머물러있으면서 이전부터 친교가 깊었던 최면장이란 독립운동자에게 무송에 들어가서 살수 있게끔 현당국의 거주승인을 받아달라고 부탁하였다. 그 부탁을 받고 최면장이 현정부를 찾아갔지만 조선인혁명가들이 자기네 관할구역에 와서 사는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현장은 망명자라는 한가지의 리유로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런 때에 무송의 대부호 장만정이 병에 걸리여 명의를 물색한다는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날아왔다. 아버지는 최면장의 부탁을 받고 장만정을 치료해주었다. 이 과정에 장만정은 아버지의 붓글씨를 보고 혹했다고 한다. 그도 글씨를 잘 썼다. 이것을 계기로 하여 나의 아버지와 장울화의 아버지는 친구가 되였다. 우리 아버지는 장만정에게도 현정부가 무송거주를 승인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최면장은 최면장대로 장만정을 설복하고 무송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유지이며 지식분자인 사회장을 만나 교섭하였다. 사회장이란 무송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던 사춘태선생을 말한다. 사춘태선생이 교장을 하면서 교육회 회장을 겸하였기때문에 무송사람들은 이름대신 그를 사회장이라고도 불렀다. 사회장은 방조를 약속하였다.

그후 장만정이 현정부를 찾아가 조선인망명자 한사람이 있는데 그가 시내에 들어와 의원을 차릴수 있도록 허락해달라, 그의 거주를 승인해주면 일본놈들의 도발에 걸려들것 같아서 당신이 망설이고있다는것은 나도 잘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강탈한 일본놈들을 반대해서 싸우는것은 응당한 일이 아닌가, 당신도 친일파는 아니니 승인하면 좋지 않은가, 여기에 일본령사관도 없는데 겁날게 무엇인가, 림강에서 파견되여오는 령사관 경찰들과 밀정들만 속이면 될텐데 김형직이 무송에 들어오는것을 반대하지 말아달라고 설복하였다. 감심한 현장은 우리 아버지의 무송거주를 승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장만정은 우리 아버지가 페교된 백산학교를 복구한 다음 그 인가를 얻으려고 안타깝게 뛰여다닐 때에도 현상무회 부회장 겸 교육회 위원의 자격으로 유지들과 함께 현당국을 설복하여 인가를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우리 일가앞에 타개하기 어려운 생활상 고충이 가로놓일 때마다 그는 수고가 필요하면 수고를 바치고 금력이 필요하면 금력을 바치면서 온갖 성의를 다하여 사심없는 도움을 주었다. 우리 가정에 대한 장씨일가의 방조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간후에도 계속되였다. 장만정은 우리 어머니가 혼자서 자식들을 데리고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자주 돈도 보내주고 음식도 보내주군하였다.

 내가 길림에 가서 공부할 때 한번은 형권삼촌이 군벌당국에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적이 있었다. 화불단행이라는 말도 있는것처럼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얼마 안되는 때에 삼촌까지 감옥에 잡혀가니 어머니로서는 앞길이 막막하였다. 어머니는 생각다 못해 이번에도 장울화의 아버지를 찾아가 경찰당국에 설복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장만정의 교섭으로 삼촌은 인차 석방되였다.

장만정은 민족의 자주권을 주장하고 자기 조국을 열렬히 사랑한 량심적인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오불관언하고 편안하게 살아갈수 있는 거부였지만 나라를 되찾겠다고 와신상담의 길을 걷는 우리 아버지를 동정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사하신 다음에는 뜨거운 련민의 정을 가지고 나를 독립운동자로서 지지하고 옹호하여주었다.

장울화는 내가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잘 알고있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나를 단순한 독립운동자로 보고있었다.

무송에는 군벌의 앞잡이들과 일본령사관의 밀정들도 있었지만 장만정, 사춘태, 원몽주, 전아종과 같은 량심적인 유지들과 애국자들도 적지 않았다. 원몽주란 장울화의 외삼촌이다. 내가 제1우급소학교를 다닐 때 심양사범학교 출신인 그는 우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후에는 교장사업도 하였다. 원몽주가 주관하는 유희체조시간과 풍금교습시간은 학생들이 제일 사랑하는 인기시간들이였다. 국민당좌파소속의 전아종도 사상경향이 좋은 사람이였다. 한편으로는 병원도 운영하고 다른편으로는 시계방도 차려놓고 두개의 영업을 동시에 밀고나가는 사람이였는데 사상만은 아주 진보적이였다. 그의 형 전아철도 훌륭한 사람이였다.

우리 아버지와 장만정사이에 이루어진 교분은 나와 장울화의 우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가 장만정의 집으로 왕진을 가고 장만정이 마실을 오느라고 우리 집에 들락날락할 때 나는 나대로 장울화의 집에 나들이를 가고 장울화는 장울화대로 우리 집에 공부를 하러 왔다.

장울화가 집에 올 때마다 우리 어머니는 그에게 조선음식을 해주었다. 장울화는 조선음식을 무척 좋아하였다. 장울화네 집에서는 나에게 교즈를 빚어주었다. 장울화가 조선음식을 좋아하듯이 나도 교즈를 대단히 좋아하였다. 산동지방출신들이 교즈를 잘 만들었다. 장만정은 산동지방태생이였다.

1920년대 중엽의 무송시가는 우물정자모양으로 거리가 형성되여있었다. 시내 동쪽에 동문 1개와 북쪽에 북문 1개, 서쪽에 서문 2개가 각각 있었으며 남쪽에는 소남문과 대남문이 있었다. 대남문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장만정이 경영하던 상점이 있고 거기서 얼마쯤 더 가다가 꺾어들어가면 장울화네 집이 있었다. 우리는 이 성시의 모든 거리들을 다 돌아다니였고 모든 문들을 다 지나다니였다. 어디엔들 안가본데가 있고 무슨 놀음인들 안해본것이 있으랴. 나와 장울화는 학교마당에서 정구도 자주 치고 송화강에서 미역도 뻔질나게 감았다. 우리는 문예오락경연에도 같이 출연하였다.

장울화는 성미가 내성적이면서도 강직하고 열정적인 사람이였다. 정의로운것을 옹호하는 일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선참으로 뛰여들었고 불의스러운것에 대해서는 상대가 어떤 인간이건 결단코 용서하지 않았다. 일단 결심만 하면 칼날에라도 올라설수 있는 날카로운 성미였다.

한번은 어떤 경찰이 학생들의 면전에서 별치않은 일을 트집잡아 우리 학교 교원에게 심한 폭행을 가하여 쓰러뜨린적이 있었다. 교원을 하느님처럼 신성시해온 학생들은 이 놀라운 사실앞에서 눈이 뒤집혀질 지경으로 분노하였다. 나는 장울화와 함께 학생들을 발동시키는 성토연설을 하였다. 경찰이 교원을 구타한것은 학원에 대한 침해이며 교직원, 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모독이다. 자그마한 현경찰서의 경찰나부랭이가 교원을 함부로 때리다니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제자들로서 마땅히 경찰당국의 사죄를 받아내야 한다. 그 무뢰한 같은 경찰이 학교에 와서 매맞은 선생에게 모자를 벗고 사죄하라고 하자.

우리는 《교원을 구타한 야만적인 경찰을 엄벌에 처하라!》, 《교원의 정당한 권리와 리익을 보호하자!》고 쓴 프랑카드를 들고 현정부건물앞에 밀려가서 악덕경찰의 처벌을 요구하는 롱성투쟁을 벌리였다. 그러나 현정부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하고 그들을 적당히 구슬려서 이 사건을 얼렁뚱땅해 넘기려고 하였다. 투쟁은 실패하였다.

우리는 힘으로 폭행경찰을 징벌할것을 결심하였다.

어느날 밤 그 경찰이 극장으로 간다는 통보가 나한테 날아왔다. 경찰을 혼내우기에는 아주 알맞춤한 기회였다. 그런데 경찰놈을 때려준 다음 그놈들이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극장밖으로 몸을 빼려면 무대우에 걸려있는 가스등을 처리해야만 하였다. 누가 이 가스등을 끌수 있는가? 모두 이 하나의 문제를 놓고 론의를 거듭할 때 문득 장울화가 자진하여 이 임무를 맡아나섰다. 그날밤 10여명의 학생들은 극장에 가서 예정대로 거사에 착수하였다. 중간휴식시간이 되자 장울화가 무대우에 올라서서 나무막대기로 가스등을 박살냈다. 《때려라!》하는 나의 웨침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경찰놈이 꿇어앉아서 잘못을 빌때까지 호되게 그놈을 족치고 감쪽같이 뺑소니를 쳤다.

그날밤 장울화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에게 말했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흡족하구나. 부정의를 힘으로 다스린다는게 얼마나 흐뭇하고 통쾌한 일인가 하는걸 난 오늘밤에 처음으로 깨달았어.》

《그런 놈팽이들은 용서하지 말아야 해. 그런 놈들과는 한하늘을 이고 살수 없어.》

내가 이렇게 말해주자 장울화는 문득 길가에 걸음을 멈추고 서서 어조를 바꾸어 심각하게 물었다.

《성주, 소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느 학교로 가겠니?》

그것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질문이였다. 나는 소학이후의 자신의 전도에 대해서는 아직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심상하게 대답했다.

《글쎄, 사정이 허락하면 중학교에 가겠는데 나야 어디 중학까지 갈 처지가 됐니. 울화, 그럼 넌 어느 학교로 가겠니?》

《난 심양 가서 외삼촌이 다니던 사범학교를 다니고싶어.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권고하신다. 네가 만일 반대하지 않는다면 난 널 심양으로 데리고 갈테야. 거기 가서 한학교를 다니잔 말이야. 사범학교를 마치면 대학에도 같이 가구…》

《아청이, 말만 들어도 고맙다. 그런데 그게 과연 실현될수 있는 일일가?》

《왜? 학비때문에? 학비걱정은 안해도 돼. 내가 있지 않니.》

《그건 우리 부모님들이 허락하지 않을거다. 그리고 나도 공부만 하고있을 생각은 없다. 망국노가 됐는데 대학이 다 뭐야.》

《그러니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립투쟁에 나서겠단 말이지? 네가 혁명을 하러 떠날 때는 나도 너를 따라 떠나겠다.》

《심양은 어떡하고? 사범학교에 간다고 하지 않았니?》

《그건 네가 동행하는 조건에서 그렇게 한다는거구. 네가 동행하지 않는 심양행이란건 있을수 없어. 난 말이지 일평생 네곁에 있고싶어. 네가 상급학교에 가면 나도 상급학교에 가고 네가 공산당이 되면 나도 공산당이 되구…》

그날밤 장울화가 말하고저 한 요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장울화의 그 말은 나를 크게 감동시키였다. 나는 장울화의 손을 꼭 잡고 귀속말로 말했다.

《아청이, 고맙다. 그런데 공산당이 뭔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니?》

《왜 몰라. 리대소나 진독수가 하는 그런 일이겠지.》

《공산당을 하면 감옥에 갈수도 있고 죽을수도 있다는걸 각오해야 해. 너 그런 각오가 돼있니?》

《그런건 겁나지도 않아. 너하구만 같이 있는다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아.》

장울화의 이 불의적인 선언은 나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그가 무슨 충동을 받고 그런 선언을 하는지 나로서는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명백한것은 그가 그날밤 내앞에서 한 말들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무르익혀온 리상과 신념의 고백이라는것이다. 장울화는 나의 리상을 자기의 리상으로 만들려고 하였으며 나의 신념을 자신의 신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는 주의를 결정한 다음 그 주의에 맞는 친구를 선택한것이 아니라 친구를 선택한 다음 그 친구가 지향하는 주의를 선택하였다. 장래를 결정하는 방법이 아주 단순한것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하였다. 장울화의 이런 립장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우정에 그 기초를 두고있었다. 장울화는 나를 진심으로 동경하고 따랐다.

내가 화성의숙으로 떠날 때 그가 울면서 나를 따라가겠다고까지 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장울화와의 작별은 나에게 있어서도 견디기 어려웠다. 장울화가 리별을 앞두고 너무도 애달파하므로 나는 이틀밤이나 한침상에서 밤을 밝히며 그를 설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루밤은 우리 집에서, 하루밤은 장울화네 집에서 서로의 가슴을 달래였다. 내가 화전으로 출발하던 날도 그는 송화강나루터에까지 나와 울면서 나를 바래주었다.

그날 그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성주, 신분의 차이라는게 주무랑마봉보다 더 높을가?》

《신분의 차이 같은건 여기에 아무 상관도 없어. 너의 아버지가 네 요구를 허락하지 않은건 아직 객지생활을 시키고싶지 않아서 그러시는거야.》

《만일 신분의 차이때문에 아버지가 그런 구속을 한다면 난 너와의 우정을 위해서 기꺼이 가난뱅이가 될 결심이 돼있어. 하여튼 성주, 네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하건 난 어느때든지 네곁으로 찾아간다는걸 잊지말고 있어라.》

장울화는 그후 이 결심을 그대로 실행하였다. 내가 길림에서 육문중학교를 다닐 때 그는 자기 아버지의 권총을 훔쳐가지고 어데로 간다는 말도 없이 가족들 몰래 슬그머니 나를 찾아왔다.

아닌밤중에 기별도 없이 불쑥 나타난 장울화를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성주, 난 마침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너의 곁으로 찾아왔다. 자 이것이 내 결심이다!》

장울화는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는 깨고소해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잔뜩 뒤로 제끼고 천정의 한점을 뚫어지게 응시하였다.

《너의 아버지가 용케 너를 놔주었구나.》

《놔준다는게 다 뭐야. 당장 심양으로 떠나라는걸 뿌리치고 몰래 빠져왔는데.》

《부모님들이 걱정하지 않겠니?》

《대소동이 벌어졌을거야. 그러나 그까짓거 괜찮아. 찾다가 없으면 누구든지 길림으로 오겠지. 십중팔구는 너한테 와있을거라구 짐작할테니까.》

장울화의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장울화가 길림에 나타난 며칠후 그의 형 장울중이 가병들을 데리고 육문중학교에 찾아와 동생의 행적을 수소문하였던것이다. 동생이 나한테 와있다는 말을 듣자 그는 오금을 꺾으며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있다니 됐다. 그런걸 우린 토비한테 붙잡혀간줄로만 알았구나.》

《울중형님, 우리가 옆에서 잘 돌보아줄테니 아청의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장울중은 《성주, 나는 마음놓고 가겠다. 울화는 너한테 맡긴다.》라고 하였다. 그는 장울화에게서 권총도 회수하지 않은채 가병들을 데리고 무송으로 돌아가버리였다.

그후 나는 장울화를 오가자와 고유수지방에 파견하였다. 그는 이 고장들에서 1년쯤 교편을 잡다가 부모들의 소원대로 상급학교 공부까지 다 끝낸 다음 다시 우리 대오에 와서 혁명활동을 하는것이 좋겠다는 나의 권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나와 장울화와의 우정은 상봉과 리별이라는 두개의 극점의 부단한 교차속에서 날이 가고 달이 바뀔수록 더 깊어갔다.

나와 장울화의 상봉을 마련해준 그 동굴이 지금도 무송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한다. 《ㄱ》자형으로 된 이 동굴의 길이는 15메터가량 되였는데 비밀접선장소로서는 이보다 더 리상적인 처소를 생각할수 없을 정도로 대자연속에 깊숙이 파묻혀있었다.

장울화는 나를 만나자 막 울면서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나도 사진현상약냄새가 푹 배인 그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였다.

《성주, 어데 갔다가 인제야 오오? 그새 왜 한번도 무송에 나타나지 않았나 말이요? 내가 성주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오?》

장울화의 첫 인사였다.

《낸들 왜 울화를 보고싶지 않았겠소. 나도 무송에 오고싶었소. 무송에 와서 울화를 만나고싶었소.》

《그럼 편지라도 할것이지. 나는 성주 주소를 모르지만 성주야 내 주소를 알지 않소.》

《울화, 용서해주오. 우리가 살던 간도의 유격구에는 우정국이라는것도 없었소.》

《우정국이 없다니? 아니, 세상에 그런 고장도 다 있소?》

나는 지나간 4년동안 우리가 겪어온 고초들에 대하여 낱낱이 말해주었다.

장울화는 내가 말하는 동안에도 손등으로 계속 눈물을 훔치였다.

《울화, 왜 그냥 울기만 하오? 혹시 울화한테 불길한 일이라도 생긴게 아니요?》

나는 말을 중도반단하고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울화는 눈물을 훔치면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였다.

《성주가 걸어온 지난날이 너무도 비참해서 그러는거요. 성주가 그런 고초를 겪을 때 그곁에 내가 없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막 찢어지는것 같소.》

《아니요. 울화는 항상 내곁에 있었소. 내곁에 있으면서 나를 고무해주었소.》

《고맙소. 성주가 나를 잊지 않았다는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오. 사람들이 성주를 장군이라고, 사령관이라고 부르던데 나도 이제부터는 그렇게 부르겠소.》

장울화가 느닷없이 사령관이야기를 화제에 올리는 바람에 나는 바삐 손을 내저었다.

《울화, 다른 사람들이 다 사령관이라고 불러도 울화만은 제발 성주라고 불러주오. 나도 울화를 선생이 아니라 울화라고 부르겠소.

성주, 울화! …이게 얼마나 듣기가 좋아.

그런데 울화, 울화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소?》

장울화는 늙은이들처럼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고나서 쓸쓸하게 웃었다.

《성주의 과거사를 듣고나니 내 인생에 대해서는 이러쿵저러쿵 말할 생각이 나지도 않소. 내가 도대체 그 닭의 둥우리 같은 무송바닥에서 무슨 일을 할수 있었겠소. 화성의숙시절의 성주 동창생인 강병선이하구 둘이서 〈형제서국〉과 〈형제사진관〉을 꾸리구 그걸 거점으로 삼아서 공청조직을 지도한것밖에 없소.》

그는 공청조직의 활동정형과 무송지방 반일단체들의 움직임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하였다.

나는 그동안 장울화가 쌓아올린 사업성과를 고무해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공청조직을 모체로 하여 무송지구에 당조직을 내올데 대한 새로운 과업을 주었다.

장울화는 그 과업을 받고 몹시 난처해하였다.

《성주, 내 능력으로 그처럼 큰일을 해낼수 있을가? 나야 지하사업경험도 미숙하지 않아.》

《4년동안 공청조직을 지도해왔으면 그것도 큰 경험이라구 봐야지. 내가 김산호정치위원을 자주 보낼테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의 방조를 받으라구.》

우리의 담화는 3시간이상이나 계속되였다.

담화가 사업상의 문제로부터 다시 사생활문제에로 넘어갔을 때 장울화가 불쑥 내 팔굽을 움켜잡고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마지못해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한 소식, 철주가 전사한 소식, 영주가 남의 집 눈치밥을 얻어먹으면서 아동단생활을 하고있는 소식을 차례로 전해주었다. 그것은 사실 화제에 올리고싶지 않았던 사연들이였다. 장울화의 성미를 잘 알고있는 나는 그가 그 소식을 듣고 침통한 기분에 잠길것 같아 은근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면 내자신의 상처에도 피가 흘러내릴것 같았다. 나는 4년만에 이루어진 우리의 해후에 비극적인 색채를 부여하고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일은 내가 우려하던 그대로 번져갔다. 장울화는 우리 집 소식을 듣자 한참동안 또 두손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을 터뜨리는것이였다.

《그러니 성주는 완전한 고아가 되였구만. 영주도 불쌍해. 내가 그 애를 위해 해줄만한 일이 없을가? 나한테 그 애의 주소만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주머니에서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들고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울화, 그 애도 이젠 다 컸소. 그 나이이면 자수성가도 할수 있지. 그 애에게 자선을 베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것이 좋겠소.》

장울화는 내 말에 굽어들지 않고 그냥 완강하게 수첩을 펼쳐들고있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대로 안도 김정룡의 집주소를 적어주었다. 장울화가 그렇게도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의 길을 걷지 않았더라면 그가 안도의 영주동생을 위해 큰 자선을 베풀었을것이다.

묘령동굴에서의 상봉이 있은후 우리는 다시 대영온천마을에서 두번째 상봉을 하였다. 대영의 앞산골짜기에 우리 사령부가 20∼30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가있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장울화를 만나러 가군하였다. 장울화는 그때 탕욕을 한다는 구실을 만들어가지고 대영에 며칠동안 와있었다. 우리 부대가 무송지구에 진출한후부터 적들이 나의 연고자들과 친지들의 뒤를 밟으면서 감시를 악착스럽게 하였기때문에 그도 우리 사령부의 안전을 위해 각별히 조심하였다.

나와 장울화는 온탕욕을 하면서도 많은 담화를 하였다. 그때의 담화가운데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것은 그가 나의 권고대로 공청조직에서 단련된 핵심들로 당조직을 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던 일이다. 그때 벗의 얼굴에 아침노을처럼 환하게 스며들던 행복한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수 없다.

장울화가 대영에 와있는동안 우리는 그가 추천하여 데려온 공청원 3명을 부대에 받아들이였다. 자기가 손때를 묻히며 애지중지 키워낸 청년들이 혁명군의 군복을 입고 총을 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장울화의 입가에 비끼던 그 행복한 미소도 나는 영원히 잊을수 없다. 그 3명중의 한 대원인 연비서는 교원출신으로서 후날 우리 부대가 백두산지구에 나가 활동할 때 밀영의 나무들에 구호를 많이 썼다. 그가 쓴 구호나무들이 지금도 여러밀영들에 남아있을것이다.

대영온천에서의 담화내용가운데서 지금까지도 특별히 인상깊게 추억되는것은 작별전야의 마지막대화였다. 장울화는 그때 내 손을 붙잡고 이렇게 물었다.

《성주, 난 성주를 볼 때마다 미안하게 생각되는 문제가 하나 있소.》

《무슨 문제인데?》

장울화가 얼굴에 수태를 머금고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도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혼의 덕으로 만 20살도 되기전에 장가를 들어 벌써 네해전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였고 이제 몇달만 지나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될것이요. 성주가 부대를 이끌고 남전북정의 어려운 길을 걷고있을 때 난 집에서 결혼이나 하고 아이나 키우면서 호강스럽게 살았으니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나중엔 별소릴 다하는구만. 장가를 가서 아이아버지가 되는게 무슨 죄란 말인가. 그거야 축하를 받을 일이지.》

《그런데 나보다 한살우인 성주는 아직 미혼이 아닌가. 성주, 말해보라구. 그냥 총각으로 있을 작정이요?》

《글쎄 난 아직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본적이 없소. 결혼이 나의 관심사로 되자면 좀더 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할것 같애.》

《그러다가는 때를 놓치겠소. 성주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내 무송에서 배우자를 한명 물색해보지. 무송에서 못고르면 심양, 천진, 장춘, 길림, 할빈을 다 뒤져서라도 세상이 깜짝놀랄 경국지색을 골라내겠소.》

《그만두라구. 그런 경국지색들이 뭐 산에 와서 껄껄한 통강냉이죽 대접을 받겠다던가?》

《두고보라구. 내 이제 양귀비 같은 미인을 골라내지 않나.》

장울화는 이런 롱질을 한 다음 내 손을 크게 잡아흔들고나서 대영땅을 떠났다. 그가 그 말을 하면서 남기고 간 그 미소가 내 망막속에 지울수 없는 형상으로 깊숙이 새겨지였다. 그것이 장울화가 나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미소였다.

나는 물론 그가 언명하고 간것이 롱담 절반, 진담 절반의 말이고 실현불가능의 언약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말에서 장울화만이 지닐수 있는 진실한 우정을 느끼였다. 장울화가 아니고야 나를 위해 그처럼 솔직하고 그처럼 순결하고 그처럼 열에 끓는 그런 약속을 하겠는가.

무송에 들어간 장울화는 온갖 재력과 심력을 다 동원하여 우리 부대에 대한 후원을 정열적으로 하였다. 그의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마련된 솜, 신발, 양말, 내의, 약품, 식량, 사진기재들을 비롯한 막대한 량의 원호물자들이 우리 부대의 밀영으로 련속 흘러들어 무송지구에서의 혁명군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튼튼하게 뒤받침해주었다. 장울화의 지성이 담긴 3,000원의 거금으로 우리는 아동단원들과 주력부대대원들에게 새 옷도 한벌씩 해입히고 여러가지 후방물자도 해결하였다.

대영의 경찰분서장 당진동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였다. 나는 량세봉과의 합작을 위하여 남만으로 갈 때에도 무송에서 이 사람을 만나본 일이 있었다. 우리가 다시 대영에 갔을 때 그는 밀사를 보내여 자기들에게 공개적으로 협박편지를 보내라, 그렇게 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협박에 못이기는척하면서 우리가 요구하는 물자를 다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대영경찰분서장은 《협박장》을 받은 다음부터 우리에게 돼지고기, 밀가루, 콩기름, 뜨개옷 같은 후방물자들을 여러번 달구지에 실어 보내주었다. 그 당시 경위중대가 대영경찰분서장이 보내준 물자를 가지고 20일가량 어렵지 않게 지냈다.

그해 가을 장울화는 갑자기 헌병대에 체포되여 감옥으로 끌려갔다. 적들에게 그를 밀고한것은 한때 백산청년동맹 무송현지회 회장으로 활동한적있는 나의 소학시절의 동창생 정학해였다. 그는 초기에 혁명바람을 피우면서 얼마간 돌아다니다가 변절하여 림강헌병대의 조종을 받는 선무공작반에 들어갔다. 선무공작반이란 《귀순공작대》의 이음동의어이다. 내가 부대를 이끌고 무송지방으로 진출한후 적들은 우리의 행방을 찾느라고 변절자들을 여기저기에 파견하였다.

어느날 정학해는 장울화를 찾아와 《내가 지금 김일성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는가?》고 하였다.

장울화는 《안다. 내가 얼마전에 김성주를 만나보았다.》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정학해가 과거 나의 지도를 받으면서 청년운동을 한 사람이였기때문에 그에 대한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후 장울화는 인차 경찰에 검거되였다. 사람을 호의적으로만 대하는데 버릇된 그는 지하조직의 운명을 걸머진 당소조의 책임자로서 너무나도 순진하고 무경각하였다. 사람에 대한 환상과 무경각성이 결국은 그로 하여금 오라줄에 묶인 몸이 되게 하였다. 적들은 장울화를 통하여 우리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내며 무송지구 지하조직을 일망타진할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쥐려고 그에게 온갖 악형을 다 가하였다.

그러나 장울화는 침묵으로써 그 악형에 대답하였다.

고문의 강도가 높아지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위치와 조직선을 루설할 위험이 있다고 랭철하게 판단한 그는 자결을 결심하고 자기 아버지에게 다문 며칠이라도 집에 가있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장만정은 돈과 뢰물을 먹이면서 아들을 병보석으로 내놓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적들은 장울화를 가석방시킨 다음 그와 내통하는 비밀조직선과 우리 부대의 공작선을 잡아쥐려고 밀정들을 보내여 주야로 그의 집을 감시하게 하였다.

장울화는 죽음을 앞두고 안해에게 이런 말을 남기였다.

《김일성장군과 함께 항일투쟁에 끝까지 참가하지 못하는것이 아쉽고 원통하다. 내 죽음으로 동지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김일성장군의 신임과 우정에 보답하려고 하니 당신은 너무 슬퍼말라.》

그는 《적들이 특무를 파견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를 찾고있다. 사령부를 빨리 옮기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음 사진현상약으로 쓰는 승홍을 먹고 자결하였다. 이 비통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 음력으로 1937년 10월 2일이라고 한다. 그 당시의 장울화는 25살도 되지 않은 생신한 홍안이였다.

나의 친근한 벗이며 충실한 혁명전우인 국제주의전사는 이렇게 우리의 곁을 떠나갔다.

그는 나를 위하여, 조선혁명의 사령부를 위하여, 조중량국인민의 공동위업을 위하여 포성이 우뢰치는 중화의 대지우에 사랑하는 부모처자와 채색구름처럼 아름다운 모든 숙망을 뒤에 남기고 장렬하게 요절하였다. 그가 자기자신보다 더 사랑해온 아들 장금천은 그때 네살이였고 딸 장금록은 어머니의 배속에서 방금 출생한 때였다.

사람이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일찍 죽는것보다 더 애석하고 원통한 일은 없다. 장울화가 비록 실수로 감옥행은 하였지만 사실 그는 목숨을 끊지 않아도 될 사람이였다. 헌병대에 더 많은 돈과 뢰물을 먹이면 적들이 얼마든지 그의 《죄》를 눈감아줄수도 있었고 볼기나 몇개 치고 그를 관대하게 처분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결의 길을 택하는것으로써 인생의 다음장을 스스로 포기해버리였다.

사람이 산다는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죽는다는것도 역시 간단한 일은 아니다. 천상만태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죽음중에서도 자결은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생을 과거보다 미래에 더 많이 둔 청년들의 자결은 비상한 결단과 독심을 요구한다. 지난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살기를 단념하고 죽음의 나라로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 자결가운데서 대부분의것은 자기자신을 위한것이였다. 장울화와 같이 남을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실례는 흔치 않다. 이것은 사람을 위한 사람의 희생중에서도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희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의 희생이 다른 인간들의 희생보다 더 비장하고 장중한 의미를 띠는 리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울화의 최후에 대한 비보를 접한 나는 며칠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였다. 내 몸 가까이에서 이 세상의 일각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 같은 허무감과 가슴을 세차게 떠박질리운것 같은 타박감때문에 나의 온 넋은 천야만야의 미궁으로 떨어져내리는것 같았다. 그 슬프디슬픈 나날들에 내 가슴속에서 추도가의 구슬픈 선률은 몇백번이나 울렸던가.

나는 그가 우리 부대에 입대하겠다고 했을 때 그의 청원을 들어주지 못한것을 후회하였다. 그가 만일 인민혁명군에 복무하였더라면 더 오래 살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미련이 무시로 치밀어 내 가슴을 알알하게 하였다.

 입대청원을 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 청원을 심의하고 그를 부대에 받아들였어야 하였다. 이렇게 하는것은 원칙의 요구이기도 하였다. 한 청년이 참군을 하겠다고 열렬하게 지망해나서는데 그 요구를 해결해주는것이야 응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그 원칙을 따르지 않고 1선에 서야 할 장울화를 2선에 세워주었다. 내가 원칙을 떠나면서까지 장울화의 입대청원을 부결한것은 장울화를 지나치게 사랑한데 있었다. 부자집에서 고생을 모르고 평탄하게 살아온 그가 산에 와서 온갖 시련에 부대끼는것을 나는 바라지 않았다. 자기는 그런 고생을 이겨낼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장울화는 이겨내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한 여기에 바로 그에 대한 나의 편애가 있었다. 이것을 두고 잘못된 처사라고 비난한다 하여도 나는 변명할 말이 없다.

지난날 신규식, 박영, 양림, 한위건, 장지락, 김성호, 정률성, 한악연 등 수천수만에 달하는 조선공산주의자들과 조선의 애국자들이 중국혁명을 위해 몸바쳐 싸운것처럼 수많은 중국의 아들딸들도 조선혁명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였다.

사랑에 국경이 없고 과학에 국경이 없는것처럼 혁명에도 국경이 없다. 장울화와 노비첸꼬, 체 게바라, 베쯘의 실례가 그것을 잘 말해주고있다. 장울화와 노비첸꼬는 국제주의자의 세계적전형이며 에스빠냐인민전선운동을 지원한 세계 여러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지원과 중국인민지원군의 항미원조운동은 국제주의의 세계적모범이다. 장울화의 이름은 그 모범우에서 거성처럼 빛나고있다.

오늘 장울화는 조선인민들속에서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불리우고있다. 우리 인민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그가 조선혁명앞에 세운 업적을 경건한 심정으로 추억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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