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다

 

1936년 봄은 우리에게 특별히 유난스러운 봄이였다. 그 봄에 우리는 실로 많은 일을 계획하였다. 새 사단의 조직, 조국광복회의 창립, 백두산근거지의 창설준비… 거기에 마안산을 비롯한 무송땅 곳곳에서 돌발한 갖가지 중대사들이 예상치 않았던 숱한 일거리들을 만들어놓았다.

절박하게 해결을 기다리는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고 수습하자면 안정된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주변정세는 우리에게 그런 안정을 주지 않았다. 무송지방에 군림하고있는 두 세력이 저마끔 자기나름대로 우리의 활동에 훼방을 놓으면서 장애를 주고있었다. 그 두 세력중의 하나는 왕가대장의 위만경찰《토벌대》였고 다른 하나는 만순의 산림부대(반일부대)였다.

왕가대장이란 문자그대로 왕가성을 가진 대장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왕가대장》 혹은 《왕대장》이라는 칭호에는 《토벌》계의 왕이라는 의미가 덧붙어있었다.

그는 장작림군벌군대에 복무할 당시부터 《비적토벌》을 전문해온 《토벌》의 능수였다. 9.18사변이후 당취오가 자위군을 조직하였을 때 왕가도 그에 가담하여 한동안 반일의 기치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남만원정을 나갈 때 그와 접촉하면서 괜찮은 관계를 가지였다. 그러나 당취오가 중국관내로 들어가고 자위군이 와해되자 인차 일본군에 투항하여 괴뢰만주국의 기발을 든 위만경찰대장으로 변신하였다. 그때부터 일제의 충실한 주구가 되여 이전에 련마해둔 《토벌》솜씨를 남김없이 드러내였다.

왕가대장은 《토벌》에 나서기만 하면 빈손으로 돌아오는적이 없었다. 《토벌》대상을 영낙없이 물어메치고 머리나 귀를 베여다 상전에게 바치군하였다. 그러면 일본사람들은 후한 치하와 상금을 주군하였다. 왕가대장은 특히 만순부대라면 기를 쓰고 쫓아다니면서 못살게 굴었다.

무송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반일부대들은 왕가라면 그림자만 얼씬해도 벌벌 떨었다. 반일부대에서는 왕가대장을 《무송의 리도선》이라고도 불렀다.

이웃 현인 안도의 악명높은 리도선은 집요성과 악랄성과 잔인성으로 하여 온 간도땅에 소문난 무서운 살인귀였다. 왕가대장도 리도선에 짝지지 않는 주구였다.

바로 그러한 왕가대장이 그해 봄에 우리의 주되는 적으로, 장애물로 되였다.

또한 그와 별로 못지 않게 구국군 만순이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여나섰다. 사실 무송쪽으로 나올 때 우리는 만순부대를 주요한 우군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의 반일부대들은 우리를 벗으로 여길 대신 오히려 원쑤처럼 대하고있었다. 김산호가 마안산아동단원들에게 옷을 해입힐 천을 구해가지고 오다가 산림대원들에게 강탈당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우리 대원들이 그 토비화된 산림대원들을 징벌하지 말았어야 하였는데 그만 격분한 나머지 지나친 보복을 가하였다. 그래서 일은 좀 맹랑하게 되였다. 우리앞에는 예상치 않았던 골치거리가 하나 더 생긴셈이였다.

《〈고려홍군〉은 아주 순진해서 그 누구든지 빈민들의 재물에 조금만 손을 대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 산림부대들의 곤궁 같은건 리해해주려고도 안한다. 그것들은 우리와 마음이 통하지 않는 딴 족속들이다.》

산림대원들속에서는 이런 소문이 퍼져갔다. 그들은 우리 부대의 개별적인 성원들을 보기만 해도 트집을 걸거나 해치려고 달려들었다. 공동전선을 해야 할 대상이 그런 상태이니 우리로서는 그것도 하나의 큰 골치거리였다.

우리는 간도에서 유격대를 창건하던 초시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그때와 좀 다른 점은 우리의 력량이 미력하지 않았을뿐아니라 군사적권위가 공인되여있었기때문에 적진영에 속하는 왕가대장도, 우리의 동맹자로 될수 있는 만순대장도 우리를 두려워하고있다는 사실이였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안정된 시간을 얻을수 있겠는가.

방도를 연구하던 끝에 우리는 왕가대장과는 서로 상대방을 치지 않고 적당히 지내며 만순대장과는 공동전선을 형성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왕가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보냈다.

…당신과 나는 구면이다. 당신도 나를 잘 알고있고 나도 당신을 잘 알고있다. 그러니만치 나는 흉금을 터놓고 당신에게 말하려고 한다.

우리의 주적은 일본군대이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지 않는 한 위만군경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릴 의사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우리의 요구에 동의한다면 당신이 통솔하는 경찰대와 그 관하의 각 경찰분서들을 치지 않으리라는것을 확언하면서 화평을 제기하는바이다.…

이런 식으로 편지의 서두를 뗀 다음 산림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중지하라는것, 인민혁명군이 파견한 공작원들이 성시나 부락들에 마음대로 드나들거나 머무를수 있게 하라는것, 인민혁명군을 적극 지지성원하고있는 애국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며 수감중의 애국자들을 당장 석방하라는것 등의 내용으로 된 요구조건들을 제기하고 왕가대장이 이 요구조건들을 수락하는 조건에서 무송현경내에서의 《치안유지》에 되도록 혼란을 조성하지 않을데 대하여 담보하였다.

며칠후 왕가대장으로부터 우리의 제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것과 우리가 내놓은 세가지 요구조건을 전부 수락한다는 내용의 회답이 왔다.

그리하여 우리와 왕가대장사이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일종의 비밀협약이 이루어지게 되였다. 쌍방이 서로 약속을 잘 지켰기때문에 우리와 왕가대장사이에는 얼마동안 아무런 충돌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가대장은 우리가 요구한대로 산림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중지하였고 자기 관할하의 성시나 집단부락들에 우리 공작원들이나 련락원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대하여서도 눈을 감아주었으며 조선인애국지사들에 대한 탄압과 검거도 늦추었다.

우리도 왕가대장관할하에 있는 부대들을 습격하거나 그들의 주둔지역에서 소란을 피우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나는 《민생단》보따리를 불태운 다음 대원들을 무기공작에 내보낼 때 무송현성밖에 있는 다른 지방에 나가서 전투도 하고 무기도 얻어야지 현내에서 소란을 피우면 안된다고 단단히 일러주군하였다.

왕가는 결코 미욱한 사람이 아니였다. 지나칠만큼 령리하고 민감한 사람이였다. 그는 우리가 간도와 북만에서 어떻게 활약해왔고 우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와는 애당초 싸울 잡도리부터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무송땅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받자 자기 부하들에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고려홍군〉과는 맞서지 말라. 서뿔리 덤벼들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한다. 병력이 적다고 함부로 덮치려들지 말라.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도록 피하는것이 상책이다.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애초에 걸지부터 말아야 한다.》

왕가대장은 시누런 군복을 입은 우리 군대를 보면 못본척하고 멀찍이 피해가군하였다. 그대신 시꺼먼 복장을 한 산림부대만 보면 기를 쓰고 덤벼들었다. 1, 000명도 더 되는 만순부대에 비하면 내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력량이라는것은 그리 큰것이 아니였지만 왕가대장으로부터 피해를 당하는것은 우리가 아니라 만순이네 산림부대들뿐이였다.

사실상 왕가대장과 화평하는 조항에다 만순이네 부대에 피해와 손실이 미치지 않도록 하는 요구를 밝힌것은 반일력량을 보존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930년대 후반기에 와서 반일부대들의 활동은 하강선을 긋고있었다. 구국군의 주력을 이루고있던 왕덕림, 당취오, 리두, 소병문 등의 부대들은 이미 산해관이나 또는 쏘련을 거쳐 관내로 퇴각해버리였고 왕전양부대, 전신부대와 같은 견결한 반일무장부대들은 마지막 한사람까지 결사보국할 각오를 가지고 혈전을 거듭하다가 적들에게 괴멸당하였다.

정초부대, 왕옥진부대와 같은 일부 부대들은 흰기를 들고 귀순하였다.

무송과 림강현경에 있는 만순휘하의 군소부대들과 자매부대들에서도 귀순자가 늘어났다. 1935년 가을에 초수탄에서는 마흥산부대의 투항병 90여명을 환영하는 귀순식놀음까지 벌어졌다.

구국군의 나머지 력량은 작은 집단으로 분산되여 깊은 산중에 들어박혀 소극적인 저항을 하였으며 더러는 토비로 되였다.

이런 실태는 일부 공산주의자들속에서 반일부대들과의 통일전선을 경시하고 지어 그것을 불필요한것으로 보는 경향을 낳게 하였다. 이런 상태를 그대로 방임해둔다면 반일련합전선에 대한 우리의 일관성이 없는것으로 될것이다.

우리는 왕가대장과 화평약속을 하는 한편 만순부대와 공동전선을 펼 교섭도 시작하였다.

우리 부대에는 산림부대출신의 나이 지숙한 대원이 있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만순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보냈다.

…당신의 이름은 우리 혁명군에도 널리 알려져있다. 우리는 무송에 도착하는 즉시로 당신을 만나 통성도 하고 반만항일공동투쟁대책도 의논하고저 하였다. 그런데 인사도 나누기전에 불미스러운 충돌사건이 빚어지는 바람에 그것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바이다.

우리의 정치위원이 혁명군의 후방물자를 강탈하다가 총상당한 산림대원들을 심문한데 의하면 그들은 이미 두석달전에 당신이 통솔하는 부대에서 도망쳐 토비로 전락된 탈주자들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병사들이 마치 당신휘하의 산림부대 현역대원들을 해친듯이 여론을 퍼뜨리는것은 당신들과 우리들사이의 친목을 달가와하지 않는 적들의 간계이다.

나는 량군이 오해를 풀고 불신을 해소하며 반감과 적의를 버리고 전우로, 형제로 되여 항일공동전선에 나서게 되기를 열망해마지 않는다.…

만순은 회답을 보내지 않고 우리의 제의를 무시해버렸다. 그 침묵이 말해주고있는 대답은 명백하였다. 그것은 당신네가 없어도 살아간다는것이였다. 무송일대에는 만순대장이 그런 배심으로 나올만한 정황이 실지로 조성되여있었다. 왕가대장이 우리와 약속한대로 만순부대를 비롯한 모든 반일부대들에 대한 공세를 늦추었기때문이였다. 왕가는 형식상으로만 《토벌》활동을 계속하고있는것처럼 흉내를 냈지 실제적으로는 《토벌》을 하지않았다. 만순의 모든 군소산림부대는 후원이 없이도 숨쉬고 살아갈만하게 되였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산림부대의 산발적인 방해책동을 더 부추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였다. 그러나 우리의 거듭되는 경고를 받자 그 산발적인 가해행위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공동전선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안정을 얻었다. 왕가부대도 만순부대도 더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모처럼 얻게 된 그 안정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일에 전념할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만강에 갔을 때에도 대영에 갔을 때에도 그곳 위만군경들과 평화교섭을 하고 불가침을 약속받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강에 간것이 1936년 4월말경이였다.

거기에는 30명 정도의 경찰대무력이 둥지를 틀고있었다. 그쯤되는 적을 제끼는것은 식은죽먹기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소한 무력행사도 하지 않고 대표를 보내여 경찰대와 담판을 하게 하였다.

우리가 당신들을 다치지 않을테니 당신들은 우리가 이 부락에서 마음놓고 지낼수 있게 하겠는가? 그저 못본척하고 배겨있다가 후날 상급에서 추궁하면 유격대병력이 너무 많아서 대항하지 못하고 가만있었다는 식으로 뒤처리를 할수 있는가?

경찰대는 우리의 이런 제안에 제꺽 응해나섰다. 유격대가 자기들을 다치지 않고 담판을 걸어온것만으로도 그들은 절을 할 지경이였다.

리동학은 보위단근처의 집옆에 기관총을 걸어놓고 사복입은 우리 기관총수들이 밤낮으로 경계근무를 서게 하였다.

그 기회에 나는 만강에서 조국광복회 창립과 관련하여 동강회의에 제출할 문건들의 대부분을 정리할수 있었다. 적들이 쳐들어올 념려가 없으니 일자리도 푹푹 났다.

우리는 우리와 싸우려 하지 않는 적에 대하여서는 너그럽고 관대하게 대하였다.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한 첫시기부터 철칙으로 삼아온 우리의 대적방침이였으며 항일무장투쟁의 전기간 시종일관하게 지켜온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행동준칙이였다.

우리는 남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총을 잡은 사람들이였다. 조국을 살리고 겨레를 살리는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투쟁목적이였고 사명이였다. 우리의 총검은 오로지 우리 조국을 강점하고 우리 민족을 압살하며 우리 인민의 생명재산을 침해하는 원쑤들을 징벌하는데만 바쳐졌다.

그러므로 우리 군대의 정의로운 검은 살려둘 가치를 가진자에게는 그들을 보호하는 자애로운 보검이 되여준 반면에 살려둘 가치가 없는 악질적인 반항자들에게는 단호하고도 무자비한 징벌의 검으로 되였다.

봄내 잠잠해있던 왕가대장은 무슨 충동을 받았는지 그해 여름철에 접어들면서부터 반일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다시 시작하였다. 무송현성에 주둔하고있는 일본군수비대와 헌병대가 그에게 압력을 가한것 같다. 반일부대병사들의 잘라진 머리가 무송거리의 전선대들에 다시 걸리게 되자 만순휘하의 여러 산림부대들에서는 탈주병들이 또 생기기 시작하였다. 항일구국의 리념에 투철하지 못한 리기적이며 근시안적인 산림부대의 본성이 되살아나 반일력량의 결속에 힘쓰고있던 우리를 또다시 괴롭히였다. 왕가의 《토벌》을 멈춰세우지 않으면 만순부대는 와해의 운명을 면할수 없었다.

나는 왕가대장에게 두번째로 되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당신이 수하의 경찰대를 동원하여 산림부대들에 대한 《토벌》을 재개하였다는 불쾌한 통보를 받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당신은 우리와의 협약을 저버린것으로 된다.

나는 당신이 약속을 배반한 결과로 자신의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이 없도록 심사숙고하여 처신할것을 권고한다.

완고하게 도전하고 반항하는 적에게는 우리의 관용이 적용되지 않는다는것을 명심하라.…

그 경고편지가 전달된지 한주일이 지나도록 왕가대장에게서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 만순부대에 대한 《토벌》도 중단되지 않았다. 으름장을 놓으면 겁낼줄 아느냐,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싸울테면 싸우자, 왕가대장은 아마 이런 배심이였던것 같다.

무송현내의 여러 요충지들에는 수백명의 관동군《토벌》병력이 증파되여 왔다. 왕가는 전에없이 오만방자해졌다.

7월초에 나는 왕가에게 마감으로 다시한번 더 경고를 주었다.

그 마지막편지를 보낸지 나흘만인가 닷새만인가 회답대신 왕가부대가 다시금 대첨창근처에 있는 만순부대의 어느 한 숙영지를 기습하였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무송현과 림강현사이의 어느 수림지대에 머물러있을 때였다.

왕가의 행위는 나와 나의 전우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일본상전의 조종을 받는 괴뢰만주국의 경찰대장이 공산주의자들과의 약속에 끝까지 충실하리라고 기대할수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도 중국사람이며 자기나름의 리성이 있을것이라는데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 위만군을 상대로 하여 우리가 진행해온 적군와해사업의 기초에는 그 리성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 깔려있었다. 우리가 왕가를 설복하여 불가침협약을 맺은것도 구경은 그런 믿음으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우리가 믿음을 준 적군의 중하층 장교들은 대부분 우리와의 약속에 충실하였다. 액목땅에서 우연히 나와 인연을 맺은 위만군 련대장도 그렇고 우리에게 《철군》잡지를 계통적으로 보내오던 대포시하의 위만군 대대장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구면인 왕가는 우리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차던지였다. 신념을 못가진자들이 가닿게 되는 종착점이란 배신밖에 없다. 왕가에게는 일제가 망하고 조중 량국 인민이 승리하게 된다는 신념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왕가대장의 배신을 용서할수 없었다. 더구나 그가 우리의 인내성있는 기대와 성의에 총질로 대답을 하는데 대해서는 분격을 참을수 없었다.

나는 김산호를 불러 날쌘 싸움군을 한 30명 정도 골라가지고 10련대에 가서 그 련대대원들과 함께 왕가대장을 징벌하라는 과업을 주었다.

동시에 우리도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시난차부근의 취자산으로 은밀히 이동하였다.

시난차는 크지 않은 집단부락이였지만 적《토벌대》들의 중요한 출전기지였다. 이 마을에는 경찰분서와 자위단무력도 있었다.

우리가 시난차전투를 계획하게 된 주되는 목적은 우리와의 협약을 어긴 왕가대장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적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려는데 있었다. 우리는 또한 이 전투를 통하여 새 사단을 무장시키는데 요구되는 총기류들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새로 편성된 사단은 이미 두도송화강전투에 이어 로령에서 큰 전투를 하였다. 그 전투만 잘 치르면 많은 무기를 해결할수 있었다. 우리는 치밀한 작전방안을 세우고 접어들었는데 전혀 예상치 않았던 정황이 돌발하는 바람에 싸움을 계획대로 할수 없었다. 적의 척후병 한명이 공교롭게도 우리의 매복권내에 어슬렁어슬렁 걸어들어와서 소변을 보았는데 그가 매복중에 있는 우리 대원을 발견하고 그만 황겁한 나머지 공포를 한방 쏘았다. 우리 대원도 얼결에 총을 발사하였다.적을 수십명 살상하고 무기도 몇자루 로획하였지만 전투는 계획대로 깨끗하게 결속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로령에서 적군을 완전히 소멸하지 못한 봉창을 시난차에서 단단히 하려고 하였다.

그 당시 우리 부대에는 시난차에서 위만경찰로 복무하다가 분서장의 악행에 불만을 품고 탈주해온 중국인대원이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시난차경찰분서장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가는 악한이라고 하였다. 그는 집단부락안의 인민들에게는 물론, 경찰들앞에서도 폭군으로 행세하였다. 중국인대원은 자기가 유격대에 찾아온 첫째 목적이 중국해방에 앞서 양경장을 처단하려는데 있다고 분노에 차서 말하였다. 우리가 시난차를 로령 다음의 싸움터로 선택한것은 그 탈주병이 그곳 실정을 잘 알고있다는 사정을 고려한데도 있었다.

우리는 대낮에 시난차를 치기로 하였다. 낮 12시부터 1시사이는 경찰들의 점심시간인 동시에 무기청소시간이였다. 경찰들이 총소제를 하느라고 무기를 분해해놓은 다음에 부락으로 쳐들어가면 큰 저항을 받지 않고서도 적들을 제압할수 있었다.

초물모자를 쓰고 농쟁기를 들고 농민복차림으로 변장한 유격대원들은 토성에 접근하여 재빨리 성문을 통과한 다음 경찰분서병실에 벼락같이 뛰여들었다. 경찰들은 분서장이하 모두 크게 저항도 못하고 포로의 신세가 되였다. 자위단도 다 잡혔다. 전투가 끝난 다음 우리는 경찰분서건물앞에 야외무대를 가설하고 연예공연을 하였다. 그다음 경찰분서건물에 불을 지르고 서강방향으로 철수하였다.

경찰들에게 해설사업을 한 다음 로자를 쥐여주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 때 한 포로가 우리 대원에게 슬며시 물었다.

《여보시우. 빨찌산, 성문은 어떻게 뚫고 들어왔수?》

《날아서 들어왔소.》

우리 대원은 롱으로 대답하였다.

《참 귀신이 곡할노릇이거든. 도대체 경비병이라는것들은 뭘 했을가?》

결국 우리가 의도한대로 시난차경찰분서의 습격은 왕가대장에게 큰 심리적충격을 주었다. 왕가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토벌》에 더욱 극성을 부리지 않을수 없었다.

왕가를 유인하기 위하여 무송현성근처에 나타난 김산호는 30명쯤 되는 유인조성원들에게 산림부대옷을 입히였다. 그자신도 물론 산림부대 소대장으로 변복하였다. 왕가의 구미를 제일 동하게 하는 미끼가 검은색이라는것을 우리는 잘 알고있었다.

밤중에 현성부근의 한 부락으로 내려간 김산호네 소부대는 그 부락농민들의 재물을 마구 끌어내며 산림부대 흉내를 내다가 황니하자마을로 옮겨가 꼭같은 수법으로 또 소란을 피우고는 그 마을뒤산 골짜기로 슬그머니 철수하였다.

현성주변의 촌락에 산림부대가 나타났다가 황니하자쪽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는 정보를 받은 왕가는 다음날 아침일찍 부대를 이끌고 살기등등해서 황니하자부락으로 달려왔다.

《걱정들 말고 나를 기다리라. 내 이제 그 토비놈들을 멸살시키고 돌아올테니 점심이나 잘 차리고있으라. 점심전에 내 그놈들의 목을 베여가지고 돌아오겠다. 버르장머리없는놈들!》

마을사람들앞에서 이렇게 호언장담한 왕가는 부대를 끌고 유인조의 자취를 따라 뒤산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뒤산중턱에는 10련대 전투원들이 매복해있었다. 새벽에 김산호의 유인대가 올라가 합세하였다.

여기서 우리 전투원들은 미리 허수아비로 유인가장물을 만들어 세워놓고 왕가의 눈을 홀리였다. 가장물들사이에 숨어있던 전투원들이 먼저 총소리를 냈다.

왕가와 그의 경찰 《토벌대》는 숲속의 검은 허수아비들에게 항복하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맹렬히 돌격해올라왔다. 손을 들려고도 하지 않고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고 쓰러질줄도 모르는 그 《산림대병사》들의 지꿎은 응전은 왕가의 부아를 잔뜩 돋구어주었다. 왕가는 량손에 권총을 하나씩 잡고 연방 사격을 하면서 발악하였으나 우리 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절명하였다.

운명의 마지막시각에 왕가가 어떤 교훈을 찾았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정의로운것에 대한 배신이 어떤 종말을 가져오는가를 그가 뒤늦게나마 깨달았다면 다행한 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때는 이미 늦은것이다.

왕가대장이 녹아났다는 소문을 듣자 도처의 반일부대지휘관들은 김산호를 찾아와서 왕가의 머리를 자기들에게 팔아달라고 요청하였다. 지난날 수많은 반일부대장병들의 머리를 베여 달아놓았던 왕가의 악행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의 머리를 천하가 다 볼수 있게 무송의 성문높이 매달겠다는것이였다.

나는 김산호에게 왕가의 시체를 머리칼 한오리 다치지 말고 무송현 경찰대에 가닿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후 우리는 왕가대장의 장례식이 요란스럽게 진행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장례식이 또한 우리 군대에 대한 소문을 더 크게 해주었다.

적들속에서는 우리 혁명군과 맞서서는 죽음밖에 차례질것이 없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갔다.

왕가를 징벌한 시난차전투와 황니하자전투에 대하여서는 한설야의 장편소설 《력사》에 비교적 상세하게 취급되여있다.

왕가를 제거해버린 다음 우리는 일본군대까지 제압해놓음으로써 무송일판을 완전히 우리의 천지로 만들 작정을 하였다. 정찰병들을 파견하여 각방으로 정보를 수집하던중 마침 60여명의 일본군대가 무송에서 림강쪽으로 배를 타고 가게 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인차 매복전을 조직하였다. 그 싸움 역시 아주 통쾌하였다. 파손된 배에 실려 도망친놈은 여라문명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몽땅 수장당하였다.

이런 싸움이 몇번 거듭되자 무송현일대는 우리의 천지로 되였다.

그해 여름을 우리는 대영에서 얼마동안 보냈다. 온천옆에 천막들을 쳐놓고 지내며 여러가지 사업을 벌리였다. 조국광복회 하부조직들을 내오는 사업, 무송과 림강의 산림지대에 인쇄소, 재봉소, 무기수리소, 후방병원을 포함한 밀영들을 설치하는 사업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일을 하였다.

우리가 있는곳에서 자그마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적의 주둔지였다. 우리는 대영에 가자마자 적들에게 서면으로 통고하였다.

…우리는 한동안 온천에서 지낼 작정이니 너희들은 그런줄 알고 우리앞에 나타나지도 말며 어디로 달아나지도 말라. 거기에 가만히 배겨있으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물품들을 보내주기만 하라. 그러면 너희들의 생명과 안전은 우리들이 담보한다.…

적들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감히 우리에게 범접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어디로 달아나지도 못하였다. 그대신 우리가 일러준대로 물품조달자의 역할을 고분고분 수행하였다. 우리가 지하족을 가져오라면 지하족을 가져오고 밀가루를 실어오라면 밀가루를 실어왔다.

만순이 나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왕가대장을 격멸한데 대한 축하와 문안인사를 보내온것이 바로 그무렵이였다. 얼마후에는 만순령감자신이 직접 우리를 찾아서 대영온천지로 왔다.우리가 그렇게 간절한 편지도 보내고 사절도 파견하여 공동전선을 하자고 호소하였을 때에는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던 도고한 늙은이가 제발로 찾아든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였다. 그때까지는 공동전선을 위해서 우리가 우사령도 찾아가고 오의성도 찾아갔지만 왕가대장을 제껴버린 다음에는 유명짜한 만순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왔다.

만순은 첫눈에도 쉰살이 훨씬 넘어보이는 사람이였다. 아편에 중독되여서인지 눈빛이 맑지 못하였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이런 말부터 앞세웠다.

《우리 반일부대 병사대중은 모두가 한결같이 왕가놈을 없애준 김사령을 세상에 둘도 없는 은인으로 여기고있습니다. 나는 김사령께 감사를 드리고 겸하여 사령과 형제의 의를 지니고싶은 마음을 전하자고 찾아왔소이다. 청컨대 김사령은 내가 지난날 로망하여 섭섭하게 굴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먼길을 마다하고 찾아온 이 마음을 너그러이 헤아려 나와 쟈잘리를 무어주었으면 합니다.》

만순의 요청은 한동안 나를 망설이게 하였다. 나는 지난 시기 우사령이나 오의성과 공동전선을 실현할 때 제기하였던 몇가지 조건들을 들면서 그것을 수락한다면 쟈잘리를 뭇는데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하였다. 그 조건이란 반일부대가 우리와 친교를 맺고 우군으로 지내야 한다는것, 일제에게 절대로 투항귀순해서는 안된다는것, 인민들의 재물을 빼앗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것, 우리의 공작원이나 련락원들을 적극 보호하여야 한다는것, 우리와 정상적으로 정보교환을 해야 한다는것 등이였다.

뜻밖에도 만순은 그 모든 조건에 대하여 기꺼이 동의해나섰다. 그는 내가 제기하는 조건에 대하여 보충적인 설명을 가할적마다 머리를 끄덕이며 빈번히 《달》자를 넣어 《달견》이요, 《달통》이요 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결국 우리는 단 몇시간사이의 상면으로 공동전선을 맺고 우리 량군은 서로 우군이 되였다.

만순은 그후 우리와의 언약을 한번도 저버리지 않았다.

왕가대장을 치고 만순을 끌기 위한 우리의 활동은 남호두회의이후의 조선인민혁명군의 행로에서 하나의 의의있는 사변으로 되였다. 이 사변의 의의는 비단 적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고 인민혁명군의 위력을 시위하였다는 거기에만 있지 않다. 무송지구에서 우리가 바친 불면불휴의 노력은 백두산지구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데서 튼튼한 초석으로 되였다. 이 노력으로 하여 우리는 조중 량국 인민과 애국력량의 공동전선을 실현하는 길에서도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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