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물 방 아 소 리

 

백두산의 여러 지맥들을 끼고 태여난 서간도의 농촌부락들에 들어서면 어디서나 힘차게 굽이치는 골개물을 보게 되고 그것을 동력으로 하여 낟알을 찧는 물방아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달밝은 깊은 밤에 멀리서 들려오는 그 물방아소리들은 얼마나 쩌릿한 향수를 자아내군하였던가. 조선이주민들의 눈물을 찧던 장백의 물방아들은 우리의 백두산진출과 더불어 그 용도와 의미가 달라지게 되였다.

1936년 가을부터 장백사람들은 그 물방아로 수없이 많은 낟알을 찧어서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장백땅에 걸어놓은 수십개의 크고작은 물방아들중에서 원군사업과 인연이 없는 물방아는 거의나 없었다. 물방아는 전인민적원군사업의 상징으로 나의 머리속에 깊이 새겨져있다. 우리가 백두산을 거점으로 오랜 기간 항일전쟁을 할수 있었던것은 장백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의 덕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장백지방에서 인민혁명군에 대한 지원사업을 맨처음으로 시작한것은 16도구 덕수골사람들이였다.

우리가 장백에 나와서 처음으로 들린 마을은 신창동이였다. 신창동을 포함하여 16도구골안에 있는 마을들을 통털어서 덕수골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들린 웃신창동은 두개의 골개물이 합쳐지는 합수목밑에 자리잡은 40여호 잘되는 벽촌이였다. 그곳에도 물방아가 있었다.

신창동마을사람들은 그날 우리 인민혁명군에게 물방아로 메밀을 찧어서 시원한 랭면을 대접하였다.

16도구 덕수골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원군운동은 그후 왕가골, 약수골, 지양개골을 비롯하여 온 서간도땅을 부글부글 끓게 하였다.

며칠건너 한번씩 숱한 사람들로 무어진 원호물자운반대가 쌀과 천들을 이고지고 수림속 밀로를 따라 우리 밀영으로 들어오군하였다.

이에 급해맞은 적들은 장백일대에 무력을 증파하고 인민들을 들볶았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만 보이면 마을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고 죽이였다.

《공비에게 식량과 금품을 공급하거나 그와 련락을 취한자는 통비로 인정하고 즉시 총살함.》

이것은 당시 장백현내 도처에 나붙었던 서슬이 퍼런 경고문이였다.

백두산부근의 국경마을사람들은 지하족 한컬레, 성냥 한갑도 마음대로 가지고 다닐수 없게 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밀영들에는 인민들의 원호물자가 끊임없이 흘러들어왔다.

인민혁명군에 대한 장백인민들의 원호사업은 자기자신의 사활적인 요구로부터 시작된 자발적인 사업이였다. 그들은 혁명군을 돕는 길만이 조선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원군을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칠팔월 염천과 동지섣달의 폭설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군운동에 떨쳐나섰던 장백사람들의 군상을 돌이켜볼 때마다 내 눈앞에는 영화동 촌장이며 조직원이였던 리을설의 아버지 리병혼의 강직하고 소박한 모습이 떠오르군한다. 그들 3형제는 모두 장백지방원군운동의 선구자들이였다.

1936년말 우리가 곰의골밀영에 있을 때 리병혼은 영화동혁명조직에서 준비한 원호물자를 가지고 사령부로 찾아왔다. 그들이 가지고 온 많은 원호물자들가운데서 지금까지도 인상깊게 기억되는것은 보통버선보다 솜도 많이 두고 기장도 곱절이나 긴 통버선이였다. 짐짝속에서 버선 한컬레를 뽑아내여 발에 대보니 무릎에까지 와닿았다.

나는 영화동녀인들의 알뜰한 솜씨와 지성에 못내 감탄하였다.

《이것 참 잘 만들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칭찬하자 리병혼은 얼굴을 붉히였다.

《장군님, 이 장백땅이라는데는 눈이 깊습니다. 겨울에 발건사를 잘못하면 고생이 막심합니다.》

첫 대면이였으나 나는 그가 매우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것을 인차 알수 있었다. 그는 자기를 내세울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짐군들을 이끌고 밀영에 와서도 인솔자라는 내색은 조금도 하지 않고 동료들의 뒤에 서서 조심스레 나를 쳐다보군하였다.

내가 버선을 놓지 못하고 이모저모로 살펴보고있을 때 누구인가 쌀배낭 아구리를 터쳐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령관동지, 이것 보십시오. 일본천황도 이런 보리쌀은 구경하지 못했을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자기 눈을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백설같이 하얗고 정갈한 보리쌀! 이것이 정녕 옥백미가 아니고 보리쌀이란 말인가. 쌀을 얼마나 정성껏 찧었으면 이다지도 깨끗하고 먹음직스러울가.

《아버님,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런 보리쌀은 처음 봅니다. 어떻게 찧었기에 이다지도 새하얗습니까?》

《네번 찧었습지요.》

《아니, 보리쌀이야 두번만 찧어도 밥을 해먹을수 있지 않습니까. 정말 성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을 아낙네들이 원래 그런 이악쟁이들입니다.》

리병혼은 이번에도 공로를 마을아낙네들에게 밀어버리였다. 이 쌀을 찧느라고 수고한것은 남정들이 아니라 녀인들이다, 쌀은 공력만 들이면 찧을수 있다, 네번이 아니라 열번도 찧을수 있다, 혁명군을 위한 일인데 그거야 못하겠는가, 곤난은 밀정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쌀을 찧는 집이 어느 집이고 그 집에서 무슨 쌀을 찧는가, 찧은 쌀은 어디로 날라가는가 하고 감시하는데 있다, 그 감시를 피하느라고 부녀회원들이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른다, 그들은 혜산장에 가서 혁명군에 보낼 천을 사서는 허리에 둘러감거나 기저귀처럼 접어서 아이들에게 채운다, 녀자들은 장마당출입을 할 때마다 우정 아이들을 업고 간다, 눈치를 모르는 늙은이들은 고생을 사서 한다고 사설질이다, 그래도 녀자들은 그냥 아이들을 업고 다닌다, 그래야 천을 감출만한 구실도 생기는것이라고 하였다.

리병혼은 남정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녀성들의 수고에 대해서만 입에 올리였다.

그의 말은 나를 감동시키였다. 나는 배낭속에서 보리쌀을 한줌 움켜쥐고 냄새를 맡다가 나를 에워싸고있는 사람들을 향해 말하였다.

《일본천황은 높아도 뿌리없는 나무이고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튼튼한 뿌리에서 돋아난 새싹이니 우리가 받는 이런 좋은 쌀을 천황이 어찌 구경이나 하겠습니까.》

영화동인민들이 벌린 원군운동의 전모를 우리는 이듬해에 리을설을 통하여 상세히 알게 되였다. 그해에 그는 우리 부대에 입대하였다. 그도 아버지처럼 자랑을 싫어하는 사람이였다. 더구나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의 수고와 관련된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언이라고 보아야 할지 한가지만은 말하였다. 어머니가 배낭천을 살 돈을 마련하느라고 산딸기를 따던 이야기였다.

영화동에는 농량이 모자라 고생하는 집들이 많았다. 리을설이네 집도 그런 집이였다. 그러나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면서도 혁명군을 지원하는 일에서만은 남들에게 뒤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름에는 산딸기를 따고 가을에는 머루, 다래를 따서 혜산장에 가서 팔았다. 어머니가 산열매를 따다 고를 때마다 리을설의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의 곁에 빙 둘러앉아 군침을 삼키군하였다. 자식들의 심정을 잘 아는 어머니였건만 그들에게 딸기 한알 선뜻 쥐여주지 못하였다. 아이들이 딸기를 먹으면 혁명군에 바치는 지성이 그만큼 모자라게 된다고 생각하였던것이다.

리병혼은 밀영에서 돌아가자 자식들에게 나를 만나보았다고 자랑하였다. 리을설은 그 말을 듣자 당장 유격대에 찾아가 나의 수하에서 싸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군님수하에 있는 군대들은 다들 름름하고 총도 잘 다루는데 베잠뱅이에 호미자루밖에 모르는 네가 어떻게 감히 혁명군이 된단 말이냐. 좀 더 수양을 하다가 가거라.》

리병혼은 즉석에서 그 제의를 일축해버리고 아들을 조국광복회 분회조직에 넣어 단련시키였다. 이듬해 여름에 그는 아들과 조카를 유격대에 보냈다. 사랑하는 자식들을 군대에 보내는것은 원군정신의 최고표현이였다.

리병혼은 아들을 유격대에 입대시킨후에도 혁명군에 대한 후원을 꾸준하게 하였다.

나는 1937년 늦봄에 천상수에서 다시 리병혼을 만나보았다. 그때 그가 가지고온 물감들은 보천보전투승리를 경축하는 군민련환대회에 장식할 꽃과 기발을 물들이는데 요긴하게 썼다.

정녕 장백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준 원호물자들에는 그 어느것에나 눈물겨운 지성이 깃들어있었다.

당시 화전농사를 하는 집들에서는 4명의 로력으로 1년에 기껏해서 20단 내지 30단(한단은 20말)의 감자소출을 낼수 있었다. 그런데 농마 한말을 내자면 여라문말의 감자를 갈아야 하였다. 그때 농마 한말값이 60전내외였다. 농마 한말을 팔았대야 지하족 한컬레값도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술이나 엿 같은것을 만들어 그것을 돈으로 전환시키였다. 수중에 돈이 있어도 물품을 마음대로 살수 없는 세월이여서 그 한점한점의 원군물자를 마련하자면 실로 많은 노력과 지혜를 짜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장백현사람들은 그런 악조건에서도 별의별 물품을 다 장만하여 산으로 보내주었다.

장백현에 살고있는 조선사람치고 원군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란 거의 없었다. 지팽이를 짚지 않고서는 걸을수 없는 로인들까지 산에 들어가서 피나무껍질을 벗겨왔으며 밤을 새워가며 우리에게 보낼 신을 삼았다. 부녀자들은 주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추운 겨울밤에 불도 피우지 못하고 번갈아 보초를 서가면서 방아를 찧었다.

원호물자운반조직은 대체로 촌장들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백현 촌장들은 거의다 조국광복회 분회장, 지회장들이여서 그들이 그런 일을 맡아 하는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다. 당시 우리 혁명군의 후방부관들은 촌장들 앞으로 일부러 물자조달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공문을 띄우군하였다. 촌장들이 혁명군을 위한 원호사업을 조직하더라도 적들앞에서 책임을 피할수 있는 구실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공문을 받은 촌장들은 위협에 못이기는척하면서 비밀리에 원호사업을 조직하였다.

마을에서 원호물자운반대가 떠나는 날이면 인민들이 저저마다 달려나와 물자를 지고가겠다고 자원해나섰다.

우리 대원들은 장백현의 인가들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때 우리가 자주 들려 도움을 받은 집들중의 하나가 렴보배어머니네 집이였다.

렴인환의 말에 의하면 덕수골을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은 강진건이라고 하였다. 그가 고향에서 살수가 없어 일가친척 몇사람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와 16도구골안에 마을을 꾸렸다는것이다.

렴보배는 강진건의 사촌제수였다.

렴인환은 렴보배내외가 강진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반일사상이 강하고 대가 바르다고 하였다.

그런 연고로 하여 나는 대덕수에 갔을 때 렴보배내외분을 찾아보게 되였다. 지금도 나의 눈앞에는 그때 감자를 버무린 귀밀보리밥을 차려놓고 어쩔줄 몰라하던 보배어머니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 어머니는 우리가 밤중에 들려도 곧 밥을 지어줄수 있도록 늘 커다란 함지에 귀밀쌀과 보리쌀을 불궈놓군하였다. 렴보배어머니가 지은 귀밀보리밥은 부근부근하고 구수해서 맛이 참 좋았다.

밤에 연기가 굴뚝으로 나가는것을 보면 주구들이 수상하게 여길가봐 바깥주인 강인홍은 굴뚝을 낮추고 밀짚단을 씌워 연기가 밑으로 흩어져나가게 하였다. 그 집 내외분은 다 마음이 비단같은 사람들이였다.

덕수골사람들은 모두가 살림이 째지게 가난하였지만 혁명군의 시중을 들어주는것을 하나의 큰 락으로 여기였다.

적들이 하루아침에 대덕수마을을 불바다로 만들어놓은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그것은 북간도의 《피바다》를 련상케 하는 참변이였다. 불탄재를 쓸어내고 구들장우에 초막을 세우면 적들이 또다시 달려들어 불을 질렀다.

렴보배어머니네는 할수없이 신창동 장마자로 자리를 옮기였다.

우리가 그 소식을 듣고 렴보배어머니를 만나러 장마자로 찾아갔을 때 그곳에서도 물방아소리가 들려왔다. 나에게는 그 소리가 좋은 징조로 생각되였다. 왜냐하면 물방아소리가 울리는곳에는 언제나 투쟁이 있고 원군을 최상의 락으로 여기는 인민이 있고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폭풍속에서도 드놀지 않는 조선의 넋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물방아소리는 마치도 원군으로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는 인민들의 장엄한 북소리처럼 들리였다.

나는 전령병을 데리고 먼저 물방아간으로 가보았는데 거기서 렴보배어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무릎을 꺾으며 흐느껴 울었다. 대덕수를 떠나온 어머니의 울음속에는 너무도 큰 설음이 차있었다.

《어머니, 그만 진정하십시오. 어떻게 하겠습니까, 참고 이겨내야지요.…》

나는 겨우 이렇게 위로하였다.

알고보니 그 물방아는 어머니네가 와서 새로 걸어놓은것이였다. 물방아옆에 있는 자그마한 귀틀집이 어머니네 집이였다.

그날 어머니는 이웃마을에 가서 닭을 구해다 육수물을 만들고 닭고기꾸미를 메워 농마국수를 말아주었다. 그러고도 대접이 변변치 못하다고 하면서 미안해하였다.

사실 나는 장백현마을에서 무시로 맛본 농마국수가 잊혀지지 않아 지금도 귀한 손님을 맞아 연회를 차릴 때면 언감자국수나 농마국수를 별식으로 내놓군 한다.

그날밤 어머니는 물방아소리가 나의 잠을 방해할가봐 퍼그나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였다. 그 소리를 들으면 오히려 잠도 잘 오고 사색도 잘 되였다.

어머니네가 장마자에 와서 물방아를 새로 걸어놓은것은 자기 일가의 생활상 편의를 위한것이 아니였다. 그것은 원군사업을 목적한것이였다.

그러나 이 장마자라는 두메산골도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수 있는 고장은 아니였다. 적들은 그 깊은 산중에도 촉수를 뻗치였다. 이도강경찰들이 갑작스레 달려들어 물방아를 마사버리였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려갔다. 렴보배어머니네 집사람들은 사흘동안 모진 고문을 받고 반주검이 되여 소발구에 실려 돌아왔다. 매를 제일 많이 맞은 강로인은 중태에 빠졌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어혈에 특효가 있는 곰열을 얼마간 보내주었다. 그 집 식구들은 우리가 보낸 곰열을 쓰고 다들 일어났다고 한다. 제일 상처가 심했던 강로인까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원군사업에 달라붙었다.

목수재간을 가지고있는 로인은 산에 가서 박달나무를 찍어다가 마사진 방아채를 수리하였다. 자식들은 몸을 더 추세운 다음에 일손을 잡으라고 아버지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로인의 귀에 그런 말이 곱게 들릴리가 만무하였다.

《무슨 소리들을 하느냐? 지금 팔순되는 령감, 로친들도 산에서 고생하는분들을 돕겠다구 초신을 삼는다, 버선을 깁는다 극성들인데 이만큼 오륙이 성해가지구 낮잠만 자서야 되겠느냐.》

장마자의 물방아는 다시금 원호미를 찧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강인홍로인의 부탁으로 그의 아들 강종근을 혁명군에 받아들이였다. 그리고 그를 가까이 두고 늘 보살펴주었다. 그런데 강종근은 그후에 그만 아깝게도 전사하였다.

17도구 평강덕에 있던 김세운이네 집도 혁명군을 성심성의로 도와나선 훌륭한 가정이였다.

김세운은 두 동생과 아들딸 4남매 그리고 친척들까지 모두 혁명투쟁에 참가시키고 그들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받들어준 성실한 혁명가였다. 마국화의 애인 김세옥은 그의 동생이고 항일혁명투사 김익현은 막내아들이다. 맏아들도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잘 싸웠다. 그는 입대하자마자 간삼봉전투에도 참가하였고 후에는 국내에 들어가 정치공작을 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였다. 나는 그가 15년형을 받고 권영벽, 리제순 동무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살이를 하다가 1945년 봄에 학살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

혁명군의 밀영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산간오지에 있는 김세운의 집으로는 유격대 소부대들과 정치공작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국내에서 밀영을 찾아오는 혁명가들도 이 집에서 하루밤씩 묵어가는것이 례사였다. 그의 집은 인민혁명군 대원들과 정치공작원들이 무전숙박을 하는 《려인숙》이였다. 그는 중국인지주의 땅을 얻어 부치면서 거기서 생기는 농량을 몽땅 혁명가들의 뒤바라지를 하는데 바치였다.

권영벽도 이 집에 거처를 두고 장백현내의 당사업을 지도하였다.

우리 동무들은 김세운에게 《따스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따스포》란 《따스프》라는 중국말에서 전이된것인데 취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런 별명을 들을만큼 손님을 많이 치르었다. 그 집 가마는 보통가마보다 다섯배쯤 컸다. 그처럼 큰 가마에다가 밥을 지어서는 큰 박죽으로 푹푹 퍼서 혁명군들을 대접하였다. 손님이 많은 날은 김세운이도 부엌에 내려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녀인들의 일손을 도와주었다. 그는 심한 동상으로 발뒤축이 다 문드러져서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자였지만 쌀가마니를 지고 하루에도 몇차례씩 물방아간을 드나들었다.

《내가 발뒤축만 빠져나가지 않았던들 좀 늙은대루 유격대에 들어가 군수관쯤은 할수 있는건데.…》

그는 손님들에게 자주 이런 롱담을 하였다.

소작농의 처지에서 하루에 한가마씩 밥을 지어 정치공작원들의 뒤바라지를 하였으니 과연 그 집에 무슨 낟알이 남아있었겠는가. 아마도 김세운자신은 끼니를 번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을것이다.

혁명을 지원하는 장백사람들의 헌신성은 참으로 비길데 없는것이였다. 그들은 가산을 다 털면서까지 열정적으로 혁명군을 지원하였으며 정황이 요구할 때에는 목숨까지 바치였다.

1937년 5월에 이도강으로 오가는 로상에서는 젖먹이어린아이와 한 녀인의 시체가 발견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그 녀인은 자기 집에서 유격대부상병을 몰래 치료해주다가 체포되였던 평범한 농촌녀성이였다. 일본군헌병놈이 달려들어 치료중에 있던 부상병과 녀인을 본부로 압송하였다. 그런데 그 녀자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집을 떠날 때 품속에 슬쩍 간수해가지고 온 빼또칼로 헌병장교의 얼굴을 란도질한 다음 장교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앗아냈다. 그 덕으로 혁명군대원은 구출되였다. 녀인은 부상병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권총을 틀어잡고 반시간가까이 헌병장교를 지키였다. 그러나 실신상태에서 깨여난 헌병장교가 녀인에게 달려들어 권총을 빼앗고 그와 그의 아이를 군도로 무참하게 찔러죽이였던것이다.

이 사실은 얼마후 항간에 새여나왔다.

어느날밤 녀인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 비상사건이 일어났다. 헌병대놈들은 큰 변이라도 난듯이 비명을 지르며 돌아갔다. 밀정들이 24시간동안 줄곧 감시하던 시체가 쥐도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었으니 귀신이 곡할노릇이였다. 분명 이도강이나 그 근처의 어느 혁명조직에서 기회를 보다가 잽싸게 시체를 빼내였을것이다.

장백현에 가면 주경동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 이름난 혁명가들이 많았다. 《빼또칼령감》 김룡석도 주경동에서 투쟁하였다. 그도 우에서 이야기한 그 이름모를 녀성처럼 빼또칼로 포승을 끊고 자기를 호송해가던 일본군장교놈을 찔러눕힌 일이 있었다. 김룡석이 유격대에 입대하여 군수관으로 복무할 때 전우들은 그에게 《빼또칼령감》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때부터 그 별명은 김룡석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였다. 그가 말년을 보내던 평양의 아빠트 아이들도 그를 《빼또칼령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빼또칼아주머니》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였다. 녀인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부상병도 분명 대오로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 모양이였다.

언제인가 나는 주경동지하조직원인 지봉팔로인의 집에 두 대원을 맡긴적이 있었다. 속병으로 앓고있던 김룡연과 부상을 입은 신입대원이였는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봉팔로인은 그들을 두달동안이나 정성껏 치료해주다가 적들의 《토벌》에 목숨을 잃었다.

적들이 주경동에 달려들었을 때 지봉팔로인은 혁명군대원들을 산으로 다 피신시키고 혼자서 집을 지키고있었다. 자기마저 집을 비우고 피해버리면 적들이 혁명군을 찾아 뒤산을 수색할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였다.

적들은 혁명군을 내놓으라고 을러메였으나 로인은 모른다고 잘라맸다. 적들은 가죽피대로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로인의 얼굴에서는 대뜸 선지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매가 반복되고 쌍욕지거리가 잦아질수록 로인은 더 굳게 입을 다물었다.

적들은 산채로 묻어버리겠다고 하면서 구뎅이속에 로인을 세워놓고 가슴에 총구를 들이대며 혁명군부상병이 피신한곳을 대라, 그걸 대기만 하면 상금을 주고 안대면 구뎅이에 묻어버려 구데기가 되게 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도 로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악에 받친 원쑤들은 그를 구뎅이속에 세워둔채 총살하였다. 로인은 운명직전에 마을사람들에게 소박한 부탁을 남기였다.

《우리 군대를 잘 도와주우. 그래야 새세상이 빨리 온다니까.》

지봉팔로인의 최후와 관련된 이 사건은 그후 《주경동사건》으로 불리우게 되였다. 나는 후날 김룡연동무의 보고를 듣고 그 로인의 최후에 대해 알게 되였다.

한평생 땅을 뚜지며 소박하고 깨끗하게 살아온 어진 농민이 어떻게 되여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자기를 매장하게 될 구뎅이속에서도 그처럼 태연할수 있었으며 거인처럼 꿋꿋이 서서 마지막순간을 빛나게 장식할수 있었는가.

우리 군대를 잘 도와야 새세상이 빨리 온다고 한 지봉팔로인의 유언은 인간에게 있어서 신념이 얼마나 중요하며 신념을 가진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우리모두에게 절절히 깨우쳐주고있다.

장백현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지어 목숨까지 바쳐가며 우리 혁명군을 도와주었지만 보상은 조금도 바라지 않았다. 나라가 해방된후에도 내가 이런 사람이요 하고 제 얼굴을 내민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렴보배어머니는 나라가 해방되자 자식들을 데리고 혜산에 건너와 살았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에서 산다는것을 10여년이 지나도록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는 1958년에 현지지도차로 량강도에 갔을 때에야 비로소 렴보배어머니가 혜산에서 살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역에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머리에 흰서리가 내려있었다.

《어머니, 종근이도 먼저 가고 종근이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오늘 이렇게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어머니를 만나니…》

나는 목이 메여 뒤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렴보배어머니의 남편인 강인홍로인은 혁명군을 도와준 일로 경찰서에 끌려가 매를 맞은 그 어혈로 피를 토하고 절명하였다.

나를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어머니, 난 그전에 어머니네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해방이 되여 10년세월이 지나도록 왜 나한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편지라도 한장 하면 안된답디까.》

나는 어머니의 터슬터슬한 손을 쓸어만지며 섭섭한 말을 하였다.

《내라구 왜 평양으로 장군을 찾아가고싶은 생각이 없었겠소. 하지만 장군을 찾아뵙고싶어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겠나요. 모두가 찾아가면 늘 바쁘신 장군께서 어찌 나라정사를 바로 볼수 있겠소.》

이전날 우리를 보면 신발이 벗어지는줄도 모르고 동구밖으로 뛰여나오던 그 열정적인 장백사람들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는 자기 존재를 세상에 크게 알리지도 않고 조용히 살아가고있었던것이다.

나는 그후 인차 렴보배어머니를 평양에 모셔왔다. 그리고 경치좋은 대동강변에 집을 잡아주었다.

항일혁명의 나날에 우리를 피로써 도와준 장백사람들은 다 이런 사람들이였다.

앞에서 잠간 언급한 김세운이도 1937년 가을부터는 국내에 들어가 운흥, 보천, 무산, 성진(김책시)등 여러곳을 돌아다니며 지하조직을 꾸리고 원군사업을 보장하였다.

그후에는 도문에 건너가서 해방되는 날까지 우차군으로 가장하고 지하활동을 하였다. 놀라운것은 그가 발을 상한 불구의 몸으로 성한 사람들 못지 않게 넓은 구역을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니며 지하활동을 하였다는것이다.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랑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진행해온 국내활동에 대한 자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였고 력사가들의 주의를 끌게 되였다.

어찌 이런 사람이 김세운뿐이겠는가.

그 당시 서간도사람들의 다수가 조국광복회 회원들이였는데 지금식으로 표현한다면 그들모두가 숨은 영웅, 숨은 공로자들이였다.

적들은 인민혁명군과 인민과의 련계를 끊어보려고 집단부락을 만들고 포대와 토성과 철조망으로 원군의 강줄기를 끊어버리려고 하였지만 백두산으로 흐르는 서간도사람들의 마음까지 가두어둘수는 없었다. 집단부락안의 자위단장, 촌장, 성문지기들의 대부분이 우리 사람들로 되여있었으니 적들의 집단부락소동은 하나의 웃음거리만화극에 불과하였다.

백두산근거지는 동만근거지에 있을 때보다 주민지구와의 거리가 훨씬 더 멀었다. 그러나 군민의 련계는 반대로 더 깊었다고 말할수 있다. 오가는 정도 더 열렬하였다. 인민을 믿고 백두산을 조선혁명의 새로운 책원지로 설정할 때 우리가 인민에게 건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깨끗한 애국충정과 혁명군에 대한 순정을 지닌 백두산근거지의 인민들은 기대와 상상을 초월하는 원군운동으로써 적들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장백현사람들은 혁명적원군전통의 모범을 창조하고 빛내인 영웅적인 인민들이다. 원군사업은 각계각층, 각촌각호, 남녀로소를 다 포괄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우리는 그 원군의 뒤받침을 받아 적과의 어려운 대결에서 백전백승하였다.

광활한 서간도땅을 누비며 흐르는 원군의 대하를 보면서 나는 조직화된 인민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낳는가를 새삼스럽게 절감하였다. 농호가 세집밖에 안되는 등판이나 골짜기에도 조직은 다 들어가있었다. 그런 동네에도 통신원들을 시켜 짤막한 글쪽지 한장만 보내면 사람들은 잠을 자다가도 벌떡벌떡 깨여나 혁명군이 10리밖에 와있는데 우리 마을에 와서 식사를 하겠다고 한다, 어서 빨리 차비를 해서 그분들께 더운밥을 지어드리자고 하면서 부리나케 식사준비를 하군하였다.

쪽지편지 한장이면 조직을 동원하여 서간도인민을 한꺼번에 백두산으로 부를수도 있었고 백두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게 할수도 있었다. 서간도사람들은 1936년 가을부터 우리의 구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화된 인민으로 되였기때문이다.

우리 나라 속담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서간도에서 살고있던 그 개개의 사람들은 다 구슬에 비길수 있는 귀중한 존재들이였다. 그 구슬을 보배로 만든것이 바로 서간도를 우리 세상으로 만든 조국광복회 조직이였다.

만일 우리가 서간도인민들을 조직적으로 결속시키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였겠는가. 그 개개의 구슬들은 적들에게 각개격파당했거나 진토에 묻혀 빛을 잃었을것이다. 제아무리 애국애족으로 불타는 인간이라 한들 혼자서야 무슨 맥을 추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혁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부는 조직이라고 늘 말한다. 자주화를 지향하는 각국의 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있어서 조직이 가지는 의의는 영구불변하다고 말할수 있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하여 조직의 역할이 감소되는것도 아니며 혁명이 승승장구한다고 하여 인민대중의 조직화를 약화시켜도 되는것은 아니다. 대중의 조직화는 주권을 전취하기 위한 투쟁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주권을 전취한후의 국가건설을 위해서도 필요하며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한 다음 그 성과에 토대하여 혁명을 계속해나가기 위한 투쟁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혁명에 끝이 없는것처럼 대중을 조직화하는 사업에도 종점이라는것은 있을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회발전의 생리이며 발전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이 중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법칙이다.

우리는 지금도 인민대중을 조직화하고있지만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한 다음에도 인민대중을 끊임없이 조직화할것이다. 그리고 조직화된 인민대중의 힘으로 이 땅에 영원히 부강번영하는 자주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우리 조국과 우리 제도를 철벽으로 보위할것이다.

40년대초에 일제가 소위 《일쏘선린정책》으로 세인을 기만하면서 조선공산주의자들의 《고군독전》을 떠벌이고 우리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을 때에도, 히틀러독일이 모스크바를 향해 파죽지세로 침공해들어가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비참한 종말》을 운운하고있을 때에도 나는 왕청과 장백의 물방아를 생각하면서 힘을 얻고 신심을 간직하였다.

세계《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와 그 추종국가 군대를 대적하여 싸운 시련에 찬 전화의 나날에도 나는 장백의 물방아를 회상해보면서 래일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물방아소리를 상기하면서 승리를 확신했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도 있을수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였다.

나는 분명 장백마을들을 드나들 때에 그 물방아들에서 우리에 대한 인민의 절대적인 사랑과 확고부동한 지지성원의 의지, 죽음앞에서도 변할줄 모르는 지조를 보았던것이다.

일시적후퇴시기에 나는 리극로선생과 함께 독로강(장자강)기슭을 거닐면서 그에게 장백의 물방아이야기를 해준적이 있었다.

백두산에 있을 때 장백사람들이 물방아로 원호미를 찧어보내서 우리가 굶지 않고 싸웠다는것, 원쑤들이 마을을 불사르고 물방아를 마사버려도 물방아소리는 없어지지 않았다는것, 인민에게 의거하고 인민의 힘을 발동하면 그 어떤 강적도 물리칠수 있다는것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그때 장백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자그마한 골개물에도 물방아를 걸어놓고 쓸모있게 리용하였는데 이 넓은 독로강물을 그대로 내버리는것은 너무도 아깝다, 전쟁이 끝나면 이 강을 막아서 큰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자고 하였다.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이룩된 원군전통, 군민일치의 전통은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의 나날을 거쳐 더욱 불패의것으로 확대공고화되였다.

청소한 우리 공화국이 지구상의 《최강국》과 맞서싸워 그를 타승할수 있은것은 적측이 거의 순수한 군사력만 동원한 반면에 우리측에서는 전민이 동원되고 군민이 단결하여 싸웠기때문이다.

우리의 유력한 원군전통, 군민일치의 전통은 오늘 우리 당의 지도밑에 더욱 빛나게 계승발전되고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인민이 군대를 돕고 군대가 인민을 돕는 《우리 마을, 우리 초소》, 《우리 초소, 우리 마을》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있다. 특히 김정일동지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 다음부터 그 운동은 전국의 공장, 기업소들과 농장, 가두, 학교들에 빠른 속도로 일반화되고있다.

이러한 군민관계는 세계의 어느 나라의 군건설력사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조선의 커다란 자랑이다. 군대와 인민이 하나로 뭉친 이 위대한 힘이 있음으로 하여 우리는 그 어떤 원쑤들의 위협과 공갈앞에서도 놀라지 않는다.

나는 일심단결, 군민일치를 조선혁명에서 이룩한 가장 빛나는 성과의 하나로 여긴다.

항일대전의 나날에 듣던 물방아소리는 지금도 내 귀전에서 사라지지 않고있다. 그 소리와 더불어 수없이 많은 장백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히 어려온다. 그들중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진이는 몇이고 감방에서 숨진이는 얼마인가. 원군의 길을 걷다가 백두설령에서 몸을 얼구고 쓰러진 사람은 또한 얼마이랴.

그들의 은공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어지고 감사의 정이 가슴에 차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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